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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역사 지우는 러시아… 멜리토폴서 고대 황금 유물 약탈

입력
2022.05.01 16:00
수정
2022.05.01 20:49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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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에서 가장 귀한 스키타이 유물 약탈
미술품, 종교 상징물도 2,000점 이상 사라져

2011년 12월 한국 예술의전당에서 전시됐던 스키타이 제국의 황금 유물.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1년 12월 한국 예술의전당에서 전시됐던 스키타이 제국의 황금 유물. 한국일보 자료사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남부 점령지 멜리토폴에서 고대 스키타이 제국의 진귀한 유물을 약탈했다. 남동부 마리우폴을 비롯해 동부 지역에서도 미술품과 종교 상징물 등을 무단으로 가져갔다. 역사가들은 단순한 도난 행위를 넘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역사 지우기에 나선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이반 페도로우 멜리토폴 시장이 페이스북 영상 메시지를 통해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고귀한 유물 중 하나인 스키타이인의 황금 유물을 멜리토폴 박물관에서 약탈했다”며 “현재 이 유물들의 소재가 확인되지 않는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스키타이 유물 외에도 꽃 모양 장식품, 금 접시, 오래된 무기, 300년 된 은화 등 최소 198개 소장품이 사라진 것으로 파악됐다.

멜리토폴 박물관에는 구소련 시절 훈장부터 고대 전투에 사용된 도끼까지 약 5만 점에 달하는 유물이 소장돼 있다. 가장 귀한 소장품은 기원전 8세기부터 서기 2세기까지 흑해 연안 초원지대에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던 유목민 스키타이인의 황금 장신구다. 레일라 이브라히모바 멜리토폴 박물관 관장은 지난 2월 말 러시아군이 멜리토폴을 폭격하고 도심으로 진격해 오자 스키타이 유물을 비롯해 주요 소장품을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포장해서 지하실에 숨겼다.

멜리토폴을 점령한 러시아는 예상대로 박물관을 노렸다. 러시아 군인들은 3월 중순 이브라히모바 관장을 끌고가 수시간 동안 심문했다. 간신히 목숨을 구한 그는 2주 뒤 결국 도시 밖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지난달 27일에는 박물관 경비원을 찾아가 총구를 들이밀며 스키타이 유물 위치를 대라고 협박했다. 경비원은 끝까지 협조를 거부했으나, 러시아군은 이브게니 골라우체라는 우크라이나인 부역자를 앞세워 기어이 유물을 찾아냈다. 골라우체는 러시아가 박물관 새 관장으로 임명한 인물이었다. 골라우체는 러시아 방송에 출연해 “스키타이 황금 장신구는 구소련 전체를 통틀어 큰 가치가 있는 유물”이라며 “옛 관리자들이 감춘 이 유물을 멜리토폴 주민에게 돌려줄 수 있게 됐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정부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개전 이후 우크라이나 전역의 문화 시설 250곳 이상을 공격했다. 종교 유산과 국가 기념물 등이 무수히 도난당하거나 파괴됐다. 마리우폴을 비롯해 동부 지역에서만 19세기 유명 화가의 작품, 1811년 제작된 복음서, 정교회 성상 등 2,000여 점이 강탈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가들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문화 유산을 전유하고 파괴함으로써 우크라이나의 역사적 정체성을 부정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스키타이 역사 전문가인 올렉산드르 시모넨코 우크라이나고고학연구소 연구원은 “러시아의 약탈은 우리의 삶과 자연, 문화, 산업 등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범죄 행위”라며 분노했다. 히브라히모바 관장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역사를 갖지 못했고 국가도 아니라고 줄곧 말해 왔다”며 “그들에게 우크라이나 문화는 없애야 할 적(敵)일 뿐”이라고 비난했다.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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