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원이 횡령한 600억, 이란에 돌려줄 돈... 우리은행·정부 까맣게 몰랐다

입력
2022.04.28 20:0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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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장급 직원이 6년간 세 차례 걸쳐 빼돌려
이란에 돌려줄 기업 매각 계약금으로 확인
내부 감사 '사각지대'... 정부도 이상징후 몰라


28일 오후 서울 중구 우리은행 본점 앞. 연합뉴스

28일 오후 서울 중구 우리은행 본점 앞. 연합뉴스

국내 4대 은행 중 한 곳인 우리은행에서 직원이 회삿돈 614억 원을 빼돌린 초대형 횡령 사건이 터졌다. 국내 금융사에서 벌어진 직원 횡령 사건 가운데 역대 최대 규모다.

보안과 신뢰가 생명인 시중은행, 그것도 1금융권에서 길게는 10년 가까이 거액의 횡령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금융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또 횡령금이 우리 정부가 이란 기업에 돌려줘야 하는 사실상 공적 자금으로 알려져 정부 역시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6년간 횡령…기업 매각 대금 빼돌려

28일 우리은행과 금융당국 등에 따르면 이 은행 본점 기업개선부에서 근무하던 차장급 직원 A씨는 2012년부터 2018년까지 약 6년간 세 차례에 걸쳐 614억 원을 빼돌렸다.

은행 측은 전날 감사를 통해 해당 사건을 인지하고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은행 측은 짧게는 4년, 길게는 10년 동안 회삿돈이 빠져나간 사실을 전혀 몰랐다. 내부 통제 시스템이 사실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A씨가 2018년 마지막 인출 이후 해당 계좌를 해지한 것으로 파악했다"고 말했다.

A씨가 빼돌린 돈은 과거 대우일렉트로닉스를 인수하려던 이란 다야니 가문 측에 우리 정부가 돌려줘야 하는 계약금으로 알려졌다. 가전업체 엔텍합을 소유한 다야니는 2010년 자산관리공사(캠코)가 최대주주였던 대우일렉트로닉스 인수를 추진하면서 계약금 578억 원을 냈다. 하지만 매매대금 관련 이견으로 계약이 파기되면서 채권단은 계약금을 돌려주지 않았고, 우리은행이 이를 관리해 왔다.

장기간 수백억 원을 횡령한 A씨는 감사가 이뤄진 당일까지 출근하는 여유를 보이다, 돌연 잠적한 뒤 이날 밤 경찰에 자수해 긴급 체포됐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금융감독원도 이날 전격적으로 우리은행에 대한 현장 검사에 착수했다.


고객 자산 아니었지만... 금융권 "내부 통제 실패"

A씨의 범행은 올 초 이란 측에 계약금 등을 보낼 길이 열리면서 들통이 났다. 2015년 다야니는 우리 정부를 상대로 계약금과 이자 등을 돌려달라고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했고, 2019년 우리 정부는 최종 패소했다. 하지만 미국의 대(對)이란 금융제재로 그동안 돈을 돌려주지 못했고, 올 1월 미국 측 허가로 송금 문제가 풀리면서 계좌를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우리은행 측은 횡령금이 은행이 수시로 관리하는 고객용 자산이 아닌 공탁금 형태의 자금이었던 만큼, 내부 관리감독의 '사각지대'에 있었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내부감사에 철저하기로 알려진 은행에서 6년에 걸쳐 아무 문제 없이 614억 원이 사라졌다는 것은, 이 돈이 아예 감독 대상에서 제외돼 왔다는 의미다.

하지만 금융권 안팎에선 자금 관리와 관련한 부실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분위기다. 은행권 관계자는 "은행 지점에서 수표 한 장을 발행할 때도 전산에 기록이 남아 지점장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어떤 이유든 직원이 수백억 원을 인출했는데 아무도 몰랐다는 건 명백한 내부 통제 실패"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도 "엄연히 따지면 고객 자산은 아니지만 직원 개인이 결제 없이 계좌를 자유롭게 관리했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상 징후 몰랐던 정부 책임론도 대두... 주주 날벼락

정부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결과적으로 이 돈이 안전하게 보관되고 있는지 살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우리은행을 대상으로 종합감사를 벌인 금융당국의 책임론도 거론된다.

다만 정부는 해당 계약금이 정부 예산이 아닌 만큼, 점검 자체를 하기 어려웠다는 입장이다. 정부 관계자는 "계약금은 캠코와 39개 기관으로 이뤄진 채권단 소유로 정부가 관리하는 자금이 아니다"라며 책임론에 대해 선을 그었다.

우리은행이 주력 계열사인 우리금융지주 주주들도 혼란에 빠졌다. 특히 투자자들은 직원이 2,215억 원의 회삿돈을 횡령해 주식 투자에 나섰다 적발됐던 오스템임플란트 사례를 떠올리고 있다. 오스템임플란트는 이 횡령 사건으로 지난 1월 주식 거래가 정지됐다가 이날부터 재개됐다.

이날 우리금융지주는 장 초반 6.21%까지 급락했다가, 낙폭을 줄이며 전날과 같은 1만5,300원에 거래를 마쳤다. 한편 경찰은 전날 자수한 A씨를 긴급 체포한 뒤 이날 오전부터 수사를 진행했다. 경찰 관계자는 "A씨가 돈의 사용처 등은 진술하지 않은 상태"라고 전했다.

조아름 기자
김정현 기자
박경담 기자
윤한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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