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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공호에 3개월 아기도" 마리우폴 비극… 서방 "전쟁 4주 안에 판가름"

입력
2022.04.22 21:37
수정
2022.04.22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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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폴서 2주 만에 주민 79명 탈출
푸틴 점령 주장에 美 "허위 정보" 일축
위성사진에 대규모 집단 매장지 포착
美 1조원 무기 지원… "향후 4주 분수령"

21일 우크라이나 마리우폴에서 러시아군의 공격을 피해 탈출한 여성이 자포리자 난민센터에 도착해 오열하고 있다. 자포리자=AP 뉴시스

21일 우크라이나 마리우폴에서 러시아군의 공격을 피해 탈출한 여성이 자포리자 난민센터에 도착해 오열하고 있다. 자포리자=AP 뉴시스

우크라이나 남부 도시 자포리자에 21일(현지시간) 노란색 버스가 도착했다. 사람들이 지치고 메마른 표정으로 버스에서 내렸다. 러시아군에 포위된 남동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을 극적으로 빠져 나와, 러시아군 검문소들을 통과하며, 긴장 속에 밤새 230㎞를 내달린 주민들이었다. 한 달 넘게 지하실에 숨어 생곡물을 먹으며 근근이 버텼던 피란민들은 난민센터에서 마련한 따뜻한 식사를 마주하고도 좀처럼 숟가락을 들지 못했다.

“그곳은 빛도 물도 없는 지옥이었다.” “수많은 이웃이 산 채로 불타 죽었다.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게 기적 같다.” “시신 너머 시신, 그 너머에 또 시신, 발 딛는 곳마다 시신이 널려 있다.” 피란민들은 미국 워싱턴포스트에 마리우폴의 참상을 털어놓으며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그곳엔 아직도 10만 명 넘게 남아 있다.

마리우폴에서 주민 대피가 이뤄진 건 거의 2주 만이다. 러시아군이 사실상 도시 전역을 장악한 이후로는 처음이다. 그나마도 고작 버스 4대, 79명만이 탈출에 성공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6,000명 피란 계획을 세웠지만, 러시아군이 집결지 인근을 포격해 결국 중단됐다. 이리나 베레시추크 우크라이나 부총리는 “모든 것이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느리다”며 “아주 작은 기회라도 있는 한, 주민 구출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튿날인 22일에도 안전 우려로 인도주의 대피로는 열리지 않았다. 전날 떠난 피란 버스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18일 우크라이나 마리우폴의 제철소 탁자 위에 우크라이나 국기, 군용 헬멧, 의료 문서 등이 놓여 있다. 마리우폴=AP 뉴시스

18일 우크라이나 마리우폴의 제철소 탁자 위에 우크라이나 국기, 군용 헬멧, 의료 문서 등이 놓여 있다. 마리우폴=AP 뉴시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마리우폴 점령을 선언하면서 최후 저항지인 아조우스탈 제철소에서 “파리 한 마리 빠져 나오지 못하게 봉쇄하라”고 지시했다. 고사 작전을 펴서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의도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는 “우크라이나군은 영토를 지키고 있다”며 러시아 측 주장을 “허위 정보”라고 일축했다. 제철소에서 항전 중인 스비아토슬라우 팔라마르 아조우연대 부사령관도 영국 BBC방송 인터뷰에서 “우리가 이곳에 있는 한, 마리우폴은 우크라이나 땅”이라며 “아무도 항복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제철소에는 여전히 포탄이 쉼 없이 쏟아지고 있다. 지상 시설은 대부분 파괴됐고, 지하공간에 대피한 주민 일부가 무너진 건물 아래 갇혔다. 사망자와 부상자도 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팔라마르 부사령관은 “피란민 중에는 생후 3개월 아기도 있다”며 “민간인들이 나갈 수 있도록 제3국이나 국제기구가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촉구했다.

마리우폴의 비극은 위성사진에서도 확인된다. 미국 위성업체 맥사테크놀로지가 이날 공개한 사진을 보면, 마리우폴 서쪽으로 19km 떨어진 만후시 마을에 집단 매장지가 조성됐다. 지난달 23~26일 처음 포착된 가로 180cmㆍ세로 3m 크기 구덩이들은 점점 늘어나 이달 6일에는 300개가량 포착됐다. 마리우폴 시의회는 “최대 9,000명이 묻혔을 것”이라며 “전쟁범죄를 은폐하려는 증거”라고 분노했다. 바딤 보이첸코 마리우폴 시장은 “이곳에선 삶도 죽음도 푸틴이라는 한 사람 손에 달려 있다”며 “러시아는 애초 도시를 파괴할 계획이었다”고 비판했다.

위성 포착 마리우폴 외곽 대규모 집단 매장지 (만후시 로이터=연합뉴스) 우크라이나 남동부 항구도시 마리우폴 외곽 만후시 마을 공동묘지에 새롭게 조성된 무덤을 미국 위성업체 맥사 테크놀로지가 지난 3일 촬영한 위성사진. 위쪽 도로변에 새로 만들어진 수많은 구덩이가 눈에 띈다. 맥사 테크놀로지 제공.

위성 포착 마리우폴 외곽 대규모 집단 매장지 (만후시 로이터=연합뉴스) 우크라이나 남동부 항구도시 마리우폴 외곽 만후시 마을 공동묘지에 새롭게 조성된 무덤을 미국 위성업체 맥사 테크놀로지가 지난 3일 촬영한 위성사진. 위쪽 도로변에 새로 만들어진 수많은 구덩이가 눈에 띈다. 맥사 테크놀로지 제공.

서방은 마리우폴 점령으로 기세가 살아난 러시아를 저지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공격 무기 수송을 서두르고 있다. 미국은 예고했던 대로 이날 또다시 8억 달러(약 1조 원) 규모 추가 군사지원 계획을 발표했다. 이번 목록에는 155mm 곡사포 72기, 포탄 14만4,000발, 돈바스 전투에 맞춤형으로 개발된 전술 드론(무인기) 121대 등이 포함됐다. 앞서 13일 공개한 8억 달러어치 무기 지원까지 포함해 올해 미국의 군사 원조액은 총 30억 달러(약 3조7,200억 원)를 훌쩍 넘는다. 영국도 장갑차 120대 지원 방침을 밝히며 “영국과 폴란드에서 우크라이나 군인들에게 무기 사용법을 훈련시키고 있다”고 전했다.

서방 군사당국은 앞으로 4주간 벌어질 돈바스 전투가 전쟁의 최종 결과를 결정짓고 유럽의 지정학적 판도에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고 있다. NYT는 미 행정부 고위 관리를 인용해 “러시아가 돈바스 점령에 성공하면 푸틴은 이를 지렛대 삼아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라며 “반면 실패할 경우 군사력을 다시 동원하기에는 정치적 위험이 크기 때문에 결국 평화협상에 진지하게 임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이유로 군사전문가들은 러시아군이 재편성하는 틈을 노려 우크라이나군이 선제 타격을 시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롭 리 미국 외교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은 “기존 부대 손실이 너무 크면 새 부대를 편성할 방도가 없다”며 “러시아가 돈바스에서 큰 손실을 본다면 어느 시점에서는 러시아군 전체가 공격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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