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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시대를 혁명가로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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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독립운동가'라는 통칭은 편하긴 하지만 바람직하진 않다. 친일-항일, 독립 투쟁-순응 협력의 도식적 이분법의 한계 때문이다. 통칭 독립운동가 중에는 조선 왕통의 왕당파도, 개혁적 민족주의자도 있었고, 새 세상을 위한 (사회주의) 혁명가도 있었고, 아나키스트도 있었다. 아나키스트 중에도 갈가리 나뉜 이념과 사상 사이에서 유예의 한 방편으로 그 길을 택한 이들도 있었다.
그처럼 일제 치하 36년은, 유사 이래 한반도 지식사회가 경험한 가장 역동적인 이념의 시대였다. 전통 유교 이데올로기와 황민화교육까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1900년대 전반기 지식인들은 폭죽처럼 터져나온 이념 스펙트럼 속에서 갈피를 잡기조차 힘들었을지 모른다. 알다시피 해방 후 한국 사회는 좌우의 양대 블랙홀 속으로 빠르게 빨려 들었다.
혁명가 김산(1905.4.15?~1938.10.19, 본명 장기학, 또는 장지락)의 이념은 아나키즘, 사회주의의 행로로 이어졌다. 그는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11세에 가출, 일본에서 유학을 준비하다가 관동대지진 이후 일인들의 만행을 겪고 중국행을 선택, 신흥무관학교와 황포군관학교, 중산대에서 수학했다. 10대 중반의 그는 지배자도 피지배자도 없는 아나키즘의 광활한 세계에 잠깐 매료됐다가 10대 말 중국 상하이에서 김성숙 등을 만나 사회주의의 보다 정교한 해방 이념에 빠져들었다.
중국 공산당에 입당해 청년동맹 기관지를 만들며 다양한 조선인 지부 조직활동을 전개했고, 1927년 광동코뮌에도 조선 혁명가 정예 중 한 명으로 가담해 해방의 짧은 단맛과 쓰디쓴 후폭풍을 겪었다. 그는 중국 경찰에 체포돼 현지와 조선에서 몇 차례 짧은 옥고를 치렀고, 30대엔 항일군정대학에서 물리 화학 수학 일본어 한국어를 가르쳤다. 그 시기 미국 작가 님 웨일스를 만나 약 3개월간 자신의 생애를 구술, '아리랑'이란 작품을 낳게 했다.
그는 1938년 트로츠키주의자이자 일본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보기관에 체포돼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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