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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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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2·28 대구학생의거를 소개하며 지적한 것처럼 3·15 선거는 선거부정의 수단 방법이 총동원된 선거였다. 조직폭력배까지 동원한 후보 등록·선거운동 방해, 야당 정치인 감금-구타-살인, 유권자 매수, 기표소 감시, 공개 투표, 개표 조작…. 선거 전부터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산발적으로 일어났고, 당일에도 부정투표 현장이 적발된 경남 마산과 전남 광주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마산시 민주당(야당) 당원들은 투표 당일 오전 투표소에서 무더기 기표용지를 확인, 선거 거부를 선언하며 시 당사에서 시위를 시작했다. 경찰 저지와 당 간부 연행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이 잇달아 합세해 밤 9시 무렵에는 1만여 명에 달했다. 시위대는 자유당 당사와 언론사 지국, 파출소 등에 돌을 던졌고, 경찰은 실탄을 발포했다. 7명이 숨졌고 870여 명이 부상당했다. 이승만 정부는 용공·좌익 폭도 난동이라고 비난했다.
마산상업고등학교 입시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기 위해 마산에 들렀던 전북 남원의 15세 청년 김주열은 그날 밤 귀가하지 못했고,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시신으로 발견됐다. 부산일보가 그 사실을 사진과 함께 특종 보도했고, 그 일이 기폭제가 돼 4·19혁명으로 제1공화국 이승만 정권이 몰락했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소위 혁명재판을 통해 이정재 등 정치폭력배들과 부정선거 실무 총책이던 최인규 당시 내무장관 등에게 사형을, 마산경찰서 경비주임이던 친일경찰 출신 박종표 등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된 지 50년 만인 2010년 4월 11일, 마산항 중앙부두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이 주관한 '고 김주열 열사 범국민장'이 열렸다. 다만 '열사(烈士)의 사전적 의미는 "나라를 위하여 절의를 지키며 충성을 다하여 싸운 사람"이다. 김주열은 굳이 열사가 아니어도, 그의 죽음은 애도해야 마땅하고 또 기억돼야 한다. 이런 경우 영어권에서는 주로 '촉매(catalyst)'라는 말을 비유적으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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