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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폴 “항복하는 일 없을 것”… ‘피의 교착상태’ 빠지나

입력
2022.03.21 19:24
수정
2022.03.21 22:1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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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투항 요구에 마리우폴 단호히 거부
주민 대피소 무차별 폭격… 도시 80% 파괴
키이우 포격 8명 사망·수미 암모니아 누출
교착상태 장기화 전망… 무고한 희생 우려
“러시아 병참 문제, 향후 2주 최대 분수령”

미국 민간 위성지도 기업 플래닛 랩스가 제공한 위성사진. 20일 우크라이나 마리우폴 시내 건물들이 러시아군의 공습으로 화염에 휩싸였다. 마리우폴=AP 뉴시스

미국 민간 위성지도 기업 플래닛 랩스가 제공한 위성사진. 20일 우크라이나 마리우폴 시내 건물들이 러시아군의 공습으로 화염에 휩싸였다. 마리우폴=AP 뉴시스

“항복 요구하는 서한 쓰느라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에 포위된 동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을 넘기라는 러시아의 ‘최후통첩’을 단칼에 거부했다. 러시아는 21일(현지시간) 오전 4시를 답변 시한으로 제시하며 “투항하면 인도주의 대피로를 열고 구호물자 반입을 허용하겠다”고 유인책을 내밀었으나, 마리우폴은 목숨 건 ‘항전’을 택했다.

주요 외신에 따르면 이날 이리나 베레시추크 우크라이나 부총리는 “러시아는 8페이지나 되는 항복 요구서를 쓸 시간에 주민 대피로를 열라”며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받아쳤다. 마리우폴 시의회도 “러시아는 우리에게 오전까지 답변 시간을 줬는데, 뭘 그리 오래 기다리느냐”라며 비아냥거렸다.

결과적으로 러시아는 침공 26일째인 이날도 마리우폴을 함락하지 못했다. 마리우폴을 차지해 동부 돈바스와 남부 크림반도를 잇는 육로 회랑을 완성한다면 러시아가 남부 전선에 배치된 병력을 수도 키이우 등으로 옮겨서 전세 역전을 도모해 볼 수도 있었지만, 우크라이나군과 시민들은 ‘피’로 그 길을 막았다. 페트로 안드리우셴코 마리우폴 시장 고문은 “러시아가 인도주의 약속을 지킨 적이 있느냐”라며 “최후 1인까지 싸울 것”이라고 다짐했다.

뜻대로 풀리지 않는 전황에 초조해진 러시아군은 민간인 학살로 우크라이나를 압박하고 있다. 특히 주민 대피소는 핵심 표적이다. 전날에는 400여 명이 대피한 예술학교가 무차별 폭격을 당했는데, 빗발치는 포탄에 구조작업이 지연되면서 하루가 지나도록 주민들의 생사 여부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16일 무너진 극장에서도 130명이 구조된 뒤로는 닷새째 나머지 1,000여 명에 대한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러시아군은 극장 앞뒤 공터에 ‘어린이’라고 적힌 러시아어 글자를 보고도 전투기로 포탄을 투하했다.

이미 주거용 건물 80%가 파괴되고 2,500여 명이 사망한 마리우폴은 투항을 거부한 대가로 더욱 가혹한 공격에 직면할 공산이 크다. 마리우폴 출신 드미트로 구린 우크라이나 의회 의원은 “러시아가 외교적 협상 과정에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도시를 기아 상태에 빠뜨리려 할 것”이라고 영국 BBC방송에 말했다. 베레시추크 부총리도 “항복 요구는 의도적인 속임수이자 진짜 인질극”이라고 비난했다.

러시아군이 공습한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한 쇼핑몰에서 진화 및 구조 작업이 펼쳐지고 있다. 키이우=로이터 연합뉴스

러시아군이 공습한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한 쇼핑몰에서 진화 및 구조 작업이 펼쳐지고 있다. 키이우=로이터 연합뉴스

다른 주요 도시들도 러시아군의 맹폭을 간신히 버텨내고 있다. 이날 북부 국경 도시 수미에선 화학공장에 포탄이 떨어져 유독성 가스인 암모니아가 누출되는 아찔한 사고가 발생했다. 그동안 포성이 잠잠했던 우크라이나 최대 물동항인 남서부 오데사에서도 주택단지가 개전 이후 처음으로 포격당했다. 러시아군이 본격적으로 우크라이나 앞바다 봉쇄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키이우에선 도심 쇼핑센터 화재로 최소 8명이 숨졌다. 영국 국방부는 보고서에서 “키이우 북부에서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는 가운에 러시아군이 향후 키이우를 포위하는 데 우선순위를 둘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러시아군이 핵심 요충지에서 확실한 전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전쟁이 장기간 ‘교착상태’에 빠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미국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미국 외교정책연구소 롭 리 선임연구원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몰아내지 못하겠지만, 러시아도 우크라이나를 점령하진 못할 것”이라며 “러시아가 병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지 향후 2주가 최대 분수령”이라고 내다봤다. 네덜란드 싱크탱크인 앨펀 그룹 벤 호지스 의장도 “전쟁이 러시아의 공격력과 우크라이나의 방어력이 모두 정점에 도달한 중요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며 “서방이 우크라이나군에 군사 지원을 강화해서 협상력을 높여야 한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간과해선 안 되는 사실은 이 교착상태가 무수한 희생을 낳을 것이란 점이다. 데이비드 프트라우스 전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미국 CNN방송에서 “이것은 유혈 사태이자 소모전이라는 것을 반드시 주목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이날 4차 평화협상을 재개했다. 그러나 돈바스와 크림반도 독립 문제를 두고 양국 간 입장차가 커서 여전히 합의에 이르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CNN 인터뷰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협상할 준비가 돼 있다. 협상 없이는 이 전쟁을 끝낼 수 없다”며 정상 간 담판을 재차 촉구했다. 아울러 “매일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있다”며 “전쟁을 멈추게 할 가능성이 단 1%라 하더라도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김표향 기자
허경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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