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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연희성 속에 쇠꼬챙이 같은 진실 '회란기'

입력
2022.03.11 04:30

편집자주

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 월간 공연전산망 편집장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연극 '회란기'에서 두 여인이 한 아이를 놓고 자신의 아이라 주장하고 있다. 극공작소 마방진 제공.

연극 '회란기'에서 두 여인이 한 아이를 놓고 자신의 아이라 주장하고 있다. 극공작소 마방진 제공.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는 관객들이 극 속 인물에 감정이입하여 극적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경계했다. 관객들이 극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막의 내용을 미리 공개하거나, 조명이나 연극적 장치들을 노출시켰으며, 배우들에게도 자신이 연기하고 있음을 의식하라고 지시했다. 극적 상황에 빠져드는 음악 역시 제공하지 않았다. 그가 원했던 것은 관객이 비판적으로 보고 극적 상황을 판단하는 것이었다.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연극의 사회참여적인 면을 강조한 것이지만 의도치 않게 연극적 상황을 노출시키는 방식으로 유희성을 발휘했다. 동양의 연극은 연희성이 강한 양식을 취한다. 극의 몰입보다는 연극적 상황을 유쾌하게 드러낸다는 면에서 서사극과 동양의 연극은 통하는 지점이 있다. 브레히트의 서사극 '코카서스의 백묵원'이 중국 원나라 잡극 '회란기'에서 소재를 취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연극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연희적 즐거움을 주는 연출에 일가견이 있는 고선웅이 '회란기'를 각색하여 선보인다. 솔로몬의 판결로도 유명한 친부모를 알아내기 위해 백묵으로 그은 원 안에 아이를 두고 줄다리기를 시킨 일화의 원조 작품이다. 가난하고 철없는 부모 밑에서 자란 착한 장해당은 집안의 생계를 위해 기생으로 팔려간다. 그곳에서 동네 갑부 마원외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첩이 되어 아들까지 낳는다. 본처인 마부인은 질투와 시기로 내연남인 조영사와 함께 마원외를 독살하고 장해당에게 누명을 씌우고는 마을 사람들을 뇌물로 포섭하여 아들마저 빼앗으려 한다. 결말은 익히 아는 대로 포청천의 명판결로 장해당이 누명을 벗고 마부인을 비롯한 관련 죄인들은 가혹한 벌을 받는다.

연극 '회란기'에서 포청천(가운데)이 판결을 내리기 위해 나섰다. 극공작소 마방진 제공

연극 '회란기'에서 포청천(가운데)이 판결을 내리기 위해 나섰다. 극공작소 마방진 제공

인물 자체의 선악이 분명하고 착하고 예쁜 주인공이 모진 시련에서 백마 탄 왕자(포청천)의 도움으로 해피엔딩을 맞는 전형적인 아침드라마풍의 신파적인 이야기다. 고선웅은 과장된 이야기를 더욱 과장된 연기와 코믹한 입담으로 공연 내내 웃음을 자아낸다. 장해당이 모함을 받아 모질게 매를 맞는 장면이 관객들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데, 이마저도 극 초반 이 모든 것은 연극이며 매질을 하는 몽둥이는 전혀 아프지 않은 것이라며 관객들에게 어느 정도나 아프지 않은지 직접 경험하게 하여 무게감을 덜어낸다.

이잠부의 원작이 그러하겠지만 '회란기'는 극적이기보다는 이야기적인 작품이다. 장해당이 마원외의 첩이 되어 마부인과 갈등을 빚고 아들의 친모를 찾는 송사가 주된 내용이지만, 고전 소설의 영웅담처럼 장해당이 어떠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오라비는 어떤 사람이었으며 모친이 어떤 생각으로 장애당을 기생으로 보내는지를 주절주절 늘어놓는다. 보통 갈등을 중심으로 압축하는 현대극이라면 전사(前事)로 두고 생략해버릴 내용이다. 고선웅은 긴장감 있는 극 전개를 택하는 대신 유연한 서사적 전개를 하되, 연희성을 살린 연출과 질펀한 입담으로 지루하지 않게 극을 끌어간다.

연극 '회란기' 포스터. 극공작소 마방진 제공

연극 '회란기' 포스터. 극공작소 마방진 제공

극은 시종 유머와 위트, 코믹한 상황으로 전개된다. 심지어 포청천이 무게를 잡고 죄를 밝히는 대목에서도 아들이 우는 통에 죄목을 밝히는 소리가 묻히자, 동네 아저씨처럼 투덜거리는 등 한시도 무게를 잡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딱 한번 작정하고 무게를 잡는 장면이 있다. 바로 마부인을 비롯 그와 살해를 도모한 조영사, 뇌물을 받고 거짓 증언을 한 마을 사람들, 조영사에게 뒷돈을 받고 장해당을 압송하는 길에 살해하려던 이송관들, 그리고 첫 번째 송사에서 장해담의 억울함을 살피지 않고 자신의 책무를 방기했던 마을 수령에게 죄를 언도하는 장면이다. 목에 칼을 쓴 죄인들은 죄를 언도받고, 장해담은 모든 모함에서 풀려나 마원외의 재산과 아들, 원래 그의 것이었던 것을 되돌려 받는다.

고선웅은 판결 장면에 무게를 주어 이 작품의 의도를 새겨 넣는다. “진실은 파묻어도 햇빛에 드러나고, 거짓은 감추려 해도 쇠꼬챙이처럼 뚫고 나온다.” 너무나 자명하고 당연한 결과가 종종 어긋나는 것을 목도하는 현실이기에 이 장면이 주는 울림은 크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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