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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통하지 않는 종말의 세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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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은 한국 문학의 최전선입니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나오기 전까지 널리 읽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일보는 '이 단편소설 아시나요?(이단아)' 코너를 통해 흥미로운 단편소설을 소개해드립니다.
언제고 우리가 같은 언어로 소통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적은 별로 없지만, 요즘 같은 선거철에는 특히나 이를 실감하게 된다. 특정 존재들은 정파적 이해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묘사되고, 후보 간 오가는 말들의 난장 속에서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오해, 비방, 공격, 거짓말, 허풍, 선동이 말의 속성인 것처럼 여겨지는 나날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에픽 6호에 실린 구병모 작가의 단편소설 ‘노커’는 이처럼 “익히지 않는 말들이 아귀처럼 입을 벌리고 서로의 언어를 집어삼킨” 끝에 마주한 ‘언어의 종말’을 보여준다. “과열되어 구워진 말, 삶아지고 튀겨진 말들이 인간의 인식을 형성하고 행동을 지배하던 시절” 이후 “소통이라는 이름의 건널 수 없는 강물을 사이에 둔”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다정은 어느 날 지하철 승강장에서 후드를 쓴 낯선 남자와 부딪히고 나서 언어를 잃어버리는 병에 걸린다. 난폭하게 자신을 치고 간 남자를 쫓아갔다가 그의 얼굴을 본 다정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깨어난 후부터 음성언어와 문자언어를 모두 잃어버린다. 특히 도덕이나 윤리에 관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해야 하는 사안 앞에서는 아예 사고를 형성하는 신경계가 끊어진 것 같은 상태가 된다.
곧이어 수도권을 중심으로 다정과 비슷한 사례를 보이는 환자가 잇따라 발생하더니 전국적으로 비슷한 양태를 보이는 환자가 수천 명에 달하게 된다. 모두 다정처럼 낯선 사람과 부딪힌 뒤 그를 쫓아갔다가 이후 실어증에 걸린다. 사태의 주범이지만 누구도 말하지 못한 ‘미지의 얼굴을 가진’ 존재들은 ‘노커(knocker)’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수사 당국은 시민들에게 타인과의 신체 접촉을 최소화하고 뜻밖의 접촉이 발생했을 시 추격을 자제하고 신고해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언제라도 이해 받지 못하게 되리라는, 아무 때고 오해의 대상이 되리라는 불안”이 사람들을 잠식해 나간다. 게다가 이 틈을 노려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모르는 타인들을 치고 도망가는 가짜 노커들까지 생겨난다.
혹시라도 노커의 피해자가 될까 누구도 폭행을 저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서 낯선 행인을 대상으로 한 폭행은 점차 대담해지고, 그 와중에 진짜 노커의 피해자들은 우후죽순으로 늘어난다. 언어를 잃어버린 세계는 멸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뉴스는 사라지고 수많은 사인이 오가야 하는 스포츠 경기도 중단된다. 법률의 언어로 시비를 다투는 법정은 폐쇄되고 SNS 서비스도 중단된다. 의술의 언어를 구사할 의료인이 줄어들며 병원은 문을 닫고 도시는 폐허가 된다.
“적절한 속도와 높낮이를 지닌 음성, 침묵과 호흡을 동반한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동안 존재의 기반이 흔들린다. 자신의 말을 하지 못한다. 자신의 사고를 하지 못한다.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느린 과정을 지나오는 동안 사람들은 삶이,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앞서 인간의 몸이, 무엇으로 이루어졌으며 무엇을 통해 열리는 것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소설은 어쩌면 거대한 은유다. “단지 말이 통하지 않을 뿐인데, 생화학이나 핵이나 좀비가 없어도 세상은 영화에서나 보던 종말 상황과 비슷하다”는 묘사가 소설 속 상황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쯤은 누구라도 알 테니까. 말이 있되 말이 말같지 않은 세계 끝에 우리가 만나게 되는 건, 결국 말이 사라진 멸망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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