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예프 사수한 우크라… 협상하자더니 ‘핵’ 위협한 푸틴

입력
2022.02.27 19:41
수정
2022.02.27 23:47
1면
구독

러군, 키예프·하르키프 등 대도시 총공세
우크라군 결사항전에 진군 속도 늦춰져
시민군 소총·화염병 무장, 게릴라전 준비
러·우크라 협상 합의…러, 서방에 핵 위협

우크라니아 키예프 인근 바실키프 공군기지 내 석유저장시설이 27일 러시아군의 미사일 공격을 받아 폭발했다. 바실키프=로이터 연합뉴스

우크라니아 키예프 인근 바실키프 공군기지 내 석유저장시설이 27일 러시아군의 미사일 공격을 받아 폭발했다. 바실키프=로이터 연합뉴스

우크라이나는 단결했고, 싸웠고, 버텼다. 개전(開戰) 나흘째인 27일(현지시간) 러시아군은 화력을 총동원해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와 제2도시 하르키프 등에 집중 포화를 쏟아 부었지만, 손쉽게 점령하지는 못했다. 예상보다 강한 우크라이나군의 결사항전에 진군 속도가 다소 늦춰지면서 속전속결로 전쟁을 마무리 지으려던 러시아의 초기 전략은 이미 실패했다.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소총과 화염병을 들고 게릴라전에 뛰어들었고, 세계 여러 나라가 무기를 보내 우크라이나를 돕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에 우호적이지 않다”며 핵무기 운용부대에 경계 태세를 강화할 것을 지시했다. 미국 등이 러시아를 국제금융망에서 퇴출시키는 ‘금융 핵옵션’을 꺼내자 ‘핵무기’ 위협으로 맞불을 놓은 것이다. 다만 양국 간 협상 논의가 이어지고 우크라이나 정부가 “조건 없이 만나겠다”고 밝히면서 휴전의 실마리가 마련될지 관심을 모은다.

민간인까지 공격… 무자비한 러시아군

미 CNN방송과 영국 가디언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이날 키예프 외곽 20km 지점까지 진군한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가 좀처럼 굴복하지 않자 보급망을 끊기 위해 주요 기반시설부터 집중 포격했다. 키예프 남서쪽으로 29㎞가량 떨어진 바실키프 공군기지 내 석유저장소가 미사일 공격을 받아 폭발했고, 하르키프에 있는 천연가스 수송관도 파괴됐다. 지축을 흔드는 폭발음과 함께 시뻘건 버섯구름이 새벽 밤하늘을 뒤덮었다. 각 시당국은 주민들에게 유독가스를 막기 위해 젖은 천으로 창문 틈을 틀어막으라고 긴급 공지했다. AP통신은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의 방어력을 약화시키려고 공군 비행장과 연료 보급시설을 집중 공격하고 있다”고 짚었다.

26일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한 아파트 건물이 로켓 공격을 받아 크게 손상된 모습. 키예프=AP 연합뉴스

26일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한 아파트 건물이 로켓 공격을 받아 크게 손상된 모습. 키예프=AP 연합뉴스

러시아군의 포탄은 최소한의 사리분별도 없었다. 심지어 키예프 인근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까지 노렸다. 다행히 주민 피해는 없었고 시설도 손상되지 않았지만,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유럽 전체를 위협하는 ‘환경 재앙’이 발생할 수도 있는 위기였다. 키예프 남서쪽 고층 아파트 건물에는 미사일이 떨어져 최소 2명이 사망했고, 인도주의 시설인 아동병원에도 포탄이 날아들었다. 키예프 인근에서는 교전으로 6세 남자아이가 숨졌다. 북동부 수미에선 이동 중이던 덴마크 프리랜서 기자 2명이 총격을 받기도 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범죄 행위는 집단학살의 조짐을 보인다”며 “러시아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결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엔에 따르면 러시아 침공 이후 사망자 64명을 포함해 민간인 사상자가 240명에 이르고, 36만8,000명 이상이 우크라이나를 탈출한 것으로 파악됐다.

지상전도 격화하고 있다. 러시아 남쪽 국경과 불과 32km 거리라서 침공 첫날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던 하르키프가 나흘 만에 뚫렸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군은 도심까지 밀고 들어온 러시아군을 맞아 절체절명의 심정으로 싸웠고 결국 승전보를 울렸다. 올레 시네구보프 주지사는 “하르키프 통제권을 완전히 되찾았다”며 “러시아군은 완전히 사기가 떨어졌다”고 말했다. 전방위로 포위된 키예프에서도 온종일 경습 경보가 울렸다. 오후 2시 45분 즈음 시내 중심부에서 폭발음도 들렸다. 우크라이나군은 키예프 북서쪽 소도시 부차에 방어선을 구축, 키예프로 향하는 다리를 끊고 전투를 벌이며 필사적으로 러시아군을 막고 있다.

키예프 사수 결사항전… 러시아 진군 ‘주춤’

키예프는 가까스로 버티고 있다. 키예프 시당국은 “전날 밤 러시아 공작원과 충돌이 있었지만 아직 우크라이나군 통제 아래 있다”고 밝혔다. 올렉시 레즈니코프 국방장관도 “우리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러시아에 항전하고 있다”며 군인과 경찰, 의료진, 시민군을 독려했다. 또 “우리 군과 시민이 없다면 유럽도 결코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며 “우리가 없다면 유럽은 존재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25일 수도 키예프 시내 다리 위에서 러시아군의 진격에 대비해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다. 키예프=AP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25일 수도 키예프 시내 다리 위에서 러시아군의 진격에 대비해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다. 키예프=AP 연합뉴스

실제로 서방국가들도 우크라이나군의 거센 항전에 러시아군의 진출 속도가 느려졌다고 평가했다. 전날 미국 국방부 고위 당국자는 “우크라이나를 포위했던 러시아군 50% 이상이 침공에 투입됐으나 지난 24시간 동안 결정적 계기를 만들지 못했고, 특히 북부 지역에서 고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영국 국방부도 “러시아군은 병참 문제와 우크라이나의 저항으로 고통 받으며 계획했던 대로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며 “러시아군도 다수 사망하고 포로로 잡혔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지금까지 러시아군 3,500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시민군 저항에 세계 각국 무기 지원도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결연했고 용감했다. 예비군 징집소는 전 연령대 시민들로 넘쳐났다. 총을 들지 않은 사람은 지하 대피소에서 화염병을 만들어 날랐고, 헌혈을 하려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키예프 외곽 검문소를 지키던 한 시민은 “총이 없다면 칼과 망치를 들고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도로엔 모래주머니, 나무상자, 벽돌로 바리케이트를 쌓았고, 러시아군에게 이용되지 않도록 도로 표지판도 모두 없앴다. 러시아군 차량에 화염병을 던지는 모습도 포착됐다. 시민군의 게릴라전이 본격화되면 전쟁이 장기화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시민들이 27일 러시아군에 맞서기 위해 화염병을 준비하고 있다. 키예프=AP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시민들이 27일 러시아군에 맞서기 위해 화염병을 준비하고 있다. 키예프=AP 연합뉴스

서방 국가들도 적극 힘을 보탰다. 독일은 대전차 무기 1,000개와 스팅어 미사일 500개를 보내기로 했고, 네덜란드도 로켓 추진 수류탄을 지원할 예정이다. 미국, 호주, 체코, 프랑스, 슬로바키아, 포르투갈도 무기 수송을 서두고 있다.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에서 자국으로 부상자를 데려오기 위해 특별 열차를 편성하기로 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등은 러시아 은행을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ㆍ스위프트)’에서 배제하는 초강력 제재도 단행했다.

러시아 협상 제의에 젤렌스키 “조건없이 만나겠다”

2차 대전 이후 최악의 상황에서 양국 간 협상이라는 실낱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이날 러시아는 벨라루스에 협상단을 파견했다며 우크라이나에 협상을 제안했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우크라이나와 협상을 위해 러시아 대표단이 벨라루스 남동부 호멜에 도착해 우크라이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밝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고 우크라이나 국민을 위로하는 '평화의 빛'이 전 세계를 물들였다. AP AFP 로이터 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고 우크라이나 국민을 위로하는 '평화의 빛'이 전 세계를 물들였다. AP AFP 로이터 연합뉴스

이에 젤렌스키 대통령이 “러시아와 조건 없이 만나겠다”고 밝히면서 양국이 극적으로 휴전 및 합의에 이를지 관심이 모아진다. 앞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러시아와 평화협상은 기꺼이 하겠지만 지금으로선 벨라루스에선 안 된다”며 거부했지만, 국민 피해를 줄이기 위해 협상을 결국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회담 장소는 앞서 회담 결렬의 원인이 된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나 이날 제시된 호멜이 아닌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국경 인근으로 정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양국 회담 개최 여부가 논의되는 와중에 푸틴 대통령이 핵무기 운용부대에 경계 태세를 강화할 것을 지시하면서 긴장은 또다시 고조됐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TV 연설에서 “핵 억지를 담당하는 부대에 ‘특수 전투임무 조치’ 돌입을 명령했다”고 밝혔다. 서방의 강력한 제재에 핵무기 사용으로 맞설 수 있다고 위협을 한 셈이다. 린다 토머스 그린필드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핵 억제력에 비상을 걸겠다는 푸틴 대통령의 결정은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갈등을 고조시킨다”고 지적했다.

김표향 기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