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판 ‘모가디슈’… 버림받은 말레이 외교관들 차량 4대로 탈출 시도

입력
2022.02.27 16:11

말레이 정부 방관에 독자 탈출 결심
폴란드 향해 782㎞ 대여정 돌입
"친러 정부가 사태 원인" 비판 이어져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접경지대인 셰이니 지역의 간선도로가 러시아의 침공을 피해 도망치는 차량들로 정체를 빚고 있다. 셰이니=로이터 연합뉴스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접경지대인 셰이니 지역의 간선도로가 러시아의 침공을 피해 도망치는 차량들로 정체를 빚고 있다. 셰이니=로이터 연합뉴스

주우크라이나 말레이시아 대사관의 파딜라 다우드 제1서기관(대사직무대리)은 비상한 결심을 해야 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본격화한 이후 지난 24일(현지시간) 뒤늦게 말레이시아 정부가 보내주기로 한 탈출용 버스는 25일까지 수도 키예프에 도착하지 못했다. 대사관 직원 7명과 공관에서 함께 거주 중인 가족까지 총 9명이 그의 최종 결정만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끼리 힘을 합쳐 도망치자." 고심 끝에 자력 탈출로 방향을 잡았지만 상황은 만만치 않았다. 대다수 해외 공관들은 이미 사태가 예견된 이달 중순부터 순차적으로 철수한 상태였다. 다행히 다우드 서기관은 26일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차량 4대를 구했다. 그리고 비상식량을 차량에 채운 뒤 황급히 키예프를 벗어났다.

이들의 목표는 대사관에서 782㎞ 떨어진 접경국 폴란드의 리비우 지역. 그러나 가까스로 키예프 외곽 탈출로에 도착한 이들은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처럼 뒤늦게 수도를 떠난 피란 행렬이 도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1991년 고립됐던 주소말리아 남북한 대사관 일행이 수도 모가디슈 교전지역을 차량으로 탈출해 케냐에 도착한 기적은, 아직 이들에게 실현되지 않았다.

외교관들의 고충을 들은 말레이시아 여론은 들끓었다. 전쟁 징후와 침공 예고가 있었음에도 러시아의 눈치만 보던 자국 정부가 이들을 사지에 방치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지 소식통들은 “많은 나라가 자국민 보호에 나설 때 말레이시아 정부는 ‘서방이 지어낸 이야기’라는 러시아 측 말만 믿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에서 대표적인 친러 국가로 분류된다. 지난 2014년 7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쿠알라룸푸르로 향하던 자국 항공기 MH17편이 러시아 측 지원을 받은 반군에 의해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격추됐다는 국제조사단의 발표에도, "사건이 정치화됐다"며 러시아를 옹호한 바 있다. 이후 러시아는 말레이시아산 팜유를 대량 수입하는 등 각별히 말레이시아를 대해 왔다.

현지 안보전문가 무니라 무스타파씨는 27일 홍콩 일간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서방 세계가 믿을 만한 정보를 말레이시아 정부에 여러 차례 제공했다"며 "그럼에도 외교관들의 상황을 악화시킨 정부는 책임지고 설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스마일 사브리 야콥 말레이시아 총리는 전날 "우크라이나 사태가 평화적이고 원만히 해결되길 바란다"는 짧은 입장을 밝히면서 자국 외교관들에 대한 별다른 언급은 없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난 24일 캄보디아 프놈펜을 공식 방문한 이스마일 사브리 야콥 말레이시아 총리가 캄보디아 독립기념관에서 헌화를 하고 있다. 프놈펜=EPA 연합뉴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난 24일 캄보디아 프놈펜을 공식 방문한 이스마일 사브리 야콥 말레이시아 총리가 캄보디아 독립기념관에서 헌화를 하고 있다. 프놈펜=EPA 연합뉴스


하노이= 정재호 특파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