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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혁명과 유럽 최초 보통선거

입력
2022.02.22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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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프랑스 2월혁명

2월혁명 군중의 파리 시청앞 집회. 그림 중앙의 연설가는 혁명과 2공화국 주역인 시인 겸 정치인 라마르틴이다. wikipedia

2월혁명 군중의 파리 시청앞 집회. 그림 중앙의 연설가는 혁명과 2공화국 주역인 시인 겸 정치인 라마르틴이다. wikipedia

1830년 프랑스 7월혁명으로 입헌군주가 된 '평민왕' 루이 필립에게 유권자는 귀족과 부르주아였고, 정작 그를 왕으로 추대하는 데 기여한 노동자 농민 등 하층민은 아니었다. 선거권이 부여된 시민은 전체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거기 끼지 못한 신흥 부르주아지를 중심으로 시민들은 선거법 개혁을 요구했다. 산업혁명 영향으로 성장한 노동계급도 가세했다. 하지만 1846년 흉작과 1847년 불황으로 식량난과 물가 상승이 겹쳐 닥친 와중에 프랑수아 기조 내각은 의회 개혁파의 선거법 개정안을 외면했다.

국가는 1848년 2월 22일, '개혁 연회'라 불린 선거법 개정 촉구 시민 집회마저 금지했다. 그날 시민들은 집회 대신 폭동을 일으켰고, 파리에서 시작된 민중 봉기는 인근 대도시로 빠르게 확산됐다. 당시는 부르주아 자유주의 사상뿐 아니라 사회주의 이념이 노동 현장에 꽤 깊이 스민 때였다. 공교로운 우연이지만,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독일어판이 세상에 나온 게 하루 전인 2월 21일이었다.

이튿날 내각이 사임했고, 다음 날 왕은 영국으로 망명했다. 공화·사회주의파의 임시정부가 구성됐고, 4월 말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선거가 실시됐다. 비록 남성에 국한된 것이긴 하지만, 유럽 최초 보통선거였다.

나폴레옹 전쟁 등으로 '프랑스가 재채기하면 유럽이 감기에 걸린다'는 말이 떠돌던 때였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3월혁명으로 빈 체제의 상징적 존재인 메테르니히를 추방하고 통일을 위한 독일연방을 꾸렸다. 이탈리아에서는 마치니의 '청년이탈리아당'이 창당했다. 반동·복고 빈체제의 공백은 자유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 이념으로 채워졌다.

4월 선거에서 프랑스 시민은 온건 자유주의를 선택했고,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선출, 민족주의의 옛 영광을 꿈꿨다. 3년여 뒤 그는 공화정을 뒤엎고 제정으로 복귀, 스스로 '나폴레옹 3세'가 됐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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