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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전 대신 역량 과시’… 러시아 일부 철군은 푸틴 승리 신호?

입력
2022.02.17 19:30
수정
2022.02.17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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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건재 뽐내며 전술적 우위 차지"
서방 지도자, 앞다퉈 푸틴과 대화 원해
우크라이나인에 공포와 불신도 심어줘

16일 이탈리아 로마에 시사주간 타임 표지를 패러디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머리 위에 '봄 (침공) 시간?'이라고 적혀 있다. 로마=EPA 연합뉴스

16일 이탈리아 로마에 시사주간 타임 표지를 패러디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머리 위에 '봄 (침공) 시간?'이라고 적혀 있다. 로마=EPA 연합뉴스

러시아의 침공 날짜로 지목됐던 16일(현지시간) 우려했던 전쟁은 없었다. 되레 러시아는 일부 병력 철군 카드를 내밀었다. 예상치 못했던 신호다. 최고조로 달한 전운이 한때 누그러졌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알 수 없는 의도에 세계의 의문은 더 커졌다. 푸틴의 ‘노림수’에 해석이 분분한 가운데, 군사외교적 역량을 충분히 과시한 그가 사태를 장기전으로 끌고 갈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16일 블룸버그통신 등 외신을 종합하면, 전날 러시아의 ‘깜짝 회군’ 발표는 푸틴 대통령이 긴장감 조성을 통해 달성하려던 목표를 손에 넣었기 때문이란 평가다. 우크라이나 인근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한 것은 국경을 넘기보단, 러시아 건재를 세계에 뽐내는 목적이 컸다는 게 요지다.

실제 러시아는 이번 위기를 통해 소련 붕괴 이후 약해졌던 존재감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맘껏 이용해 서방과 동등한 협상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탈리아 정치학자 루치오 카라치올리는 현지 매체 라스탬파에 “이번 사태로 러시아 중심의 유럽 안보구조 논의가 시작됐고, 러시아가 강대국이란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며 “서방을 상대로 전술적 우위를 차지한 셈”이라고 설명했다. 키어 자일스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 연구원은 가디언에 “모스크바(러시아)가 주도권을 쥐고, 푸틴이 외교적 승리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국제무대 정치적 위상도 공고히 했다. 지난해 11월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서방과 러시아 간 갈등이 본격화한 이후 미국과 유럽 정상들은 앞다퉈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에 나서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한 시간 넘게 통화했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직접 러시아로 날아가 그를 만나기도 했다. 서구 유력 지도자들이 푸틴 대통령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줄 서는 모양새가 됐다는 의미다. 러시아 출신인 레오니드 베르시드스키 블룸버그 칼럼니스트는 “저(低)비용 움직임만으로 푸틴은 크림반도 침공 이후 서방 지도자들로부터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다”며 “그의 요구가 공감을 받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다른 정상들의 머릿속에 ‘러시아에 뭔가를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심게 됐다”고 설명했다.

16일 러시아 육군 전차부대가 훈련을 마치고 주둔지로 복귀하고 있다. 러시아 국방부는 해당 사진을 공개하며 철군을 주장하고 있지만, 서방국들은 되레 러시아가 병력을 늘렸다고 주장하며 진실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 국방부 제공 AP 연합뉴스

16일 러시아 육군 전차부대가 훈련을 마치고 주둔지로 복귀하고 있다. 러시아 국방부는 해당 사진을 공개하며 철군을 주장하고 있지만, 서방국들은 되레 러시아가 병력을 늘렸다고 주장하며 진실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 국방부 제공 AP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발을 묶은 것이야말로 적잖은 성과다. 당장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 가입을 쉽게 거론하지 못하게 됐다. 앉은 자리에서 나토 동진(東進)을 막아낸 것이다. ‘불신’도 심어줬다. 미국과 영국 등은 수도 키예프 주재 자국민과 외교관들에 줄줄이 소개령을 내린 상태다. 주권 국가엔 합리적 행동이었을 수 있지만, 우크라이나인들에게는 적지 않은 배신감을 줬다는 게 베르시드스키 칼럼니스트의 설명이다. 그는 “이 조치는 우크라이나에 ‘당신은 혼자 싸우게 될 것’이라는 분명한 메시지가 됐다”며 “우크라이나인들이 당장 서방에 등을 돌리지 않겠지만, 위선에 대한 인식은 지우기 어렵게 됐다”고 설명했다.

결국 이번 철군은 석 달간 긴장으로 1라운드에서 전략적 우위에 섰다고 판단한 푸틴 대통령이 ‘일시 후퇴’에 나섰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러시아 철수는 푸틴 스스로 이미 승리했다고 생각하는 신호일 수 있다”고 풀이했다. 그러나 이게 끝은 아니다. 러시아가 언제든 외교 무대에서 군사력을 무기로 삼을 수 있다는 우려는 더 커지고 있다. 미크 마란 에스토니아 대외정보국장은 “전쟁 위협은 푸틴의 주요 정책도구가 됐다”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략이 성공을 거두면 러시아는 수년 안에 발트3국에 대한 압박을 강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허경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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