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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를 잃고 왕은 피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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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1896년 2월 11일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 궁에 난입한 일인 낭인들이 왕비(명성황후)를 시해(을미사변)한 지 석 달 만이었다. 조선의 이권을 두고 일본과 각축하던 러시아가 우위를 차지하게 된 결정적 사건이었다.
김홍집 내각에 포진한 친일 개화파 세력과 배후의 흥선대원군, 러시아의 힘에 기대 대원군과 친일 권력을 견제하려던 왕비 사이에서 왕은 갈팡질팡했다. 자기가 없어도 왕세자(순종)라는 대안이 있다는 걸 아는 터여서, 왕비를 잃기 전부터 고종 역시 안위를 불안해했다. 당일 아침 왕과 왕세자는 러시아 공사관 수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현 서울 중구 정동의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했다. 일인 및 첩자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변복을 했다는 설도, 러시아공사관 지하 비밀 통로를 이용했다는 설도 있다. 진위는 불분명하지만, 당시 정황이 전쟁이나 쿠데타에 버금갈 만큼 긴박했다는 방증일 것이다.
정동은 한말 격동기 외교 단지였고, 성공회성당 등 외래 종교의 성지이자 이화·배제학당의 신학문이 시작된, 조선 근대의 산실 같은 곳이었다. 한성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그 언덕에 자리 잡은 러시아공사관은 서양 르네상스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첫 외교공관으로 여러모로 도드라진 장소였다. 당시 한성 시민들은 왕이 피신해 있는 그 건물을 보며 조선의 비참을 매일 각인해야 했을 것이다. 고종은 이듬해 2월 20일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했고, 그사이 러시아는 파견 고문과 친러 내각을 통해 조선의 재정·군사를 장악하고, 자원 개발 등 이권을 알뜰히 챙겼다.
아관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폐쇄됐다가 이듬해 영사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고, 1917년 제국이 혁명으로 무너지면서 1921년 폐쇄됐다가 1925년 다시 영사관으로 한국전쟁 직전인 1949년까지 운영됐다. 그 건물은 한국전쟁 중 폭격으로 대부분 파괴됐고, 현재는 탑과 지하 밀실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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