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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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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모스크바에 모인 미국·영국·소련 3국 외상이 한반도 최장 5년 신탁통치를 결의하면서, 임시정부 중심의 반탁 진영과 좌익 찬탁 진영의 대립이 격화했다. 한반도 분할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는 곧 분단에 대한 반대였다. 이듬해 신탁 이후 통일임시정부 수립 원칙을 논의하던 미소공동위원회가 난항을 겪자 이승만과 한민당은 남한만의 독립 과도정부 수립 노선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1946년 6월 이승만의 이른바 '정읍 선언'이 기점이었다.
냉전이 격화하면서 미·소 입장이 더욱 팽팽해지자 미국은 1947년 9월 유엔에 한반도 해법을 맡겼고, 유엔은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통한 한반도 단일 정부 수립안을 확정, 이듬해 1월 선거 감시 위원단을 파견했다. 하지만 북한은 1946년 2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사실상 정부로 기능하고 있었고, 소련 역시 유엔 안을 거부했다. 유엔 소총회는 1948년 2월 26일 남한 단독선거를 통한 독립정부 수립안을 가결했고, 5월 총선거를 통해 제헌국회가 꾸려졌다. 저 일련의 과정과 이승만의 초대 대통령 당선은 국제 정세에 밝았던 이승만의 승리, 정읍 선언의 정치적 승리인 셈이었다.
백범 김구의 시국성명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은 유엔 소총회가 소집되기 약 열흘 전인 1948년 2월 10일 발표됐다. 통일 독립정부 수립의 대의를 향한 민족적 단결과 유엔에 대한 촉구 및 지지,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일당에 대한 매서운 일갈을 담은 명문이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이라는 유명한 구절이 그 글의 결부에 담겨 있다. 다만 그는 민족이 단합하면 유엔이 도우리라 믿었다. "(소련의 보이콧으로) 목적을 관철하기에 부족할 때에는 유엔 전체의 역량을 발동하여서라도 기어이 성공할 것을 삼척동자라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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