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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 속 대통령의 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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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중 줄다리기에서 노인(일남)과 여성 3명이 포함된 기훈 팀은 건장한 남성들만으로 구성된 상대 팀을 보고 절망한다. 그때 노인이 “줄다리기는 작전을 잘 짜고 단합만 잘 되면 힘이 모자라도 이길 수 있다”고 읊조린다. 쓸 데 없는 소리란 비판이 나왔지만 기훈은 “얘기라도 들어보자”며 발언 기회를 준다. 노인의 전략대로 두 발을 11자로 놓은 뒤 줄을 겨드랑이에 낀 채 눕는 자세를 취한 기훈 팀은 예상을 깨고 버티는 데 성공한다. 다시 힘이 빠지면서 패색이 짙어질 때 이번엔 서울대를 나온 상우가 딱 세 발만 앞으로 가 상대 팀을 넘어뜨리자고 제안한다. 이번에도 반대가 있었지만 기훈은 “해봅시다”라는 말로 힘을 실어 준다. 결국 한 몸처럼 움직인 기훈 팀은 모두 살아남는다.
이 장면은 다양한 구성원의 작은 목소리가 배제되지 않을 때 조직의 역량이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특히 누구의 의견도 묻히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는 기훈의 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청할 줄 아는 리더가 이끄는 조직의 포용성은 기적을 만든다.
생사를 거는 건 대선 줄다리기도 다를 바 없다. 승리를 위해 후보가 갖춰야 할 자질과 덕목은 적잖다. 어떤 이는 카리스마와 리더십을 중요하게 보고, 다른 이는 확고한 국가관과 미래에 대한 비전을 우선한다. 능력을 중시할 수도, 인품을 따질 수도 있다. 그러나 오징어 게임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잘 듣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우린 이미 ‘듣지 않는 대통령’을 뽑았을 때의 대가를 잘 알고 있다. 나라가 망할 뻔한 적도 있다. 1997년 외환 위기의 그림자가 엄습할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경제 부총리와 수석의 다급한 보고도 한 귀로 흘렸다. 아들 현철씨가 수감된 뒤론 시계만 쳐다봤다는 게 관계자들 증언이다. 결국 우린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했고, 국민들은 연쇄 부도와 대량 해고를 감내해야 했다.
지난 5년도 힘들었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실패한 건 다른 목소리는 외면한 채 무능마저 독선으로 덮으려 한 오만 때문이다. 새 아파트에 살고 싶은 수요가 커 공급이 부족하다는 분석이 진작부터 나왔지만 똑같은 색깔로만 구성된 청와대는 이를 듣지 않았다. 갑자기 세금과 규제를 강화하면 오히려 매물만 잠겨 집값이 더 뛸 것이란 지적도 무시되긴 마찬가지였다. 세입자를 위한다는 임대차법의 가장 큰 피해자는 결국 세입자가 될 것이란 우려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포용국가를 외쳤지만 전혀 포용적이지 않았던 정치의 결과는 참담하다. 지역에 따라 10억 원도 넘게 뛴 아파트 가격에 노동의 가치와 삶의 의미는 무너져 버렸다. 열심히 일해도 평생 집을 마련할 수 없는 사회에서 젊은이들이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인구절벽과 지방소멸은 현실이 됐다. 이러한 분노가 결국 정권 교체 여론으로 이어졌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될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후보들의 과거와 됨됨이를 볼 때 세종대왕처럼 훌륭한 지도자를 기대하긴 힘들어 보인다. 국민들도 성인이나 영웅은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딱 하나, 다양한 목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이는 포용적인 대통령을 꿈꾸는 마음은 크다. 성별과 세대로, 이념과 빈부로, 내 편 네 편 나누기보다 한 사람이라도 더 껴안으려 노력하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한 나라의 지도자라면 반대쪽에 선 이들의 얘기도 경청할 줄 알고, 그들도 똑같은 국민으로 존중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선 줄다리기에서, 험악해진 국제정세 줄다리기에서, 미래 혁신과 일자리 전쟁이란 줄다리기에서 살아남기 위한 비결도 결국 잘 듣는 데에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일남의 외침은 현실화할 수도 있다. “이러다 다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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