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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왜곡이 만든 가족의 비극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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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 월간 공연전산망 편집장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연극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의 원제는 '부족(Tribes)'이다. 국내에서는 원제의 의미를 친절하게 풀어냈다. 작품에는 두 아들과 딸을 둔 중상류층의 집안이 등장한다. 이 가족의 족장은 언어 관련 퇴직 교수였던 아버지 크리스토퍼이다. 어머니 베스는 추리소설 작가이고 큰아들 다니엘은 논문에 대한 논문을 쓰는 연구자이며, 딸은 오페라가수 지망생이다. 이 엘리트 가족의 막내아들은 선천적인 청각장애인이지만 수어를 배우지 않고 구순술(입 모양을 읽는 법)로 사람들과 소통한다.
커다란 식탁에 모여 앉아 활기차게 대화하는 첫 장면, 언어 관련 교수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버지의 언어는 폭력적이고, 나머지 가족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소통을 위한 것이 아닌 그저 배설하기 위한 말들을 막내아들 빌리가 열심히 경청한다. 극이 진행될수록 엘리트 집안처럼 보였던 이 부족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큰아들은 대마초 중독에 종종 말을 더듬고 환청에 시달린다. 딸은 연애가 하고 싶지만 시도하지 못하고 자신의 노래 실력을 자책하며, 엄마는 추리소설을 끝내지 못한다.
그 원인은 상당 부분 가족의 족장인 폭군 아버지에게 있다. 그는 논쟁을 좋아하고 스스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부족에게도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켜 왔다. 아버지에게 엄마의 소설은 늘 부족하고, 딸과 아들의 짝은 맘에 들지 않으며, 막내아들이 청각장애인인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빌리에게 수어를 가르치지 않고 구순술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을 익히게 했다. 청각장애인 아들은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무리와 지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언제 파탄이 난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이 가족에 빌리의 청각장애인 친구 실비아가 방문하면서 본격적인 균열이 시작된다. 빌리는 청각장애인 가정에서 자라 서서히 청력을 잃어가고 있는 실비아를 만나 수어를 배우면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깨닫는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기다렸지만 한 번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가족들을 떠날 것임을 선언한다.
이 작품은 아버지의 강압적인 태도 때문에 구성원들의 삶을 불행으로 이끄는 원시적인 부족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청각장애인 아들을 마치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교육시키고 자기만족 하는 아버지를 등장시켜 원시 부족 같은 가족의 특별한 관계를 폭로한다. 이것만으로도 훌륭한 플롯을 완성하며 가족에 대해 의미 있는 성찰을 하게 하지만 작품은 조금 더 논의를 진행시켜서 메시지를 확장시킨다.
실비아는 청각장애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 서서히 청각을 잃어가고 있다. 이미 오빠가 겪은 일이다. 실비아는 청력이 있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자신이 청각장애인이 되어가는 것, 정확히는 그것을 일깨워주는 일들을 피하려고 한다. 수어를 배운 후 원가족보다는 실비아의 가족에게 더 친근감을 느낀 빌리는 그런 실비아를 이해하지 못하고, 실비아에게 청작장애인의 무리에 속할 것을 요구한다. 크리스토퍼가 우월함으로 무장한 부족이었다면, 청각장애인에 포함된 빌리 역시 자신들의 커뮤니티에서 타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족이었던 것이다.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에서 언어는 강압적인 관계를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아버지는 언어와 수어를 비교하면서 언어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수어의 부족함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이 무의미하게도 작품 곳곳에서 언어는 제대로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미끄러진다. 차마 말하지 못한 속내가 벽면 가득 활자화되기도 하고, 행동이나 표정에서 언어로 감추려했던 속내를 들키기도 한다. 때로는 더듬거리는 말로 온전히 진심을 전달하기도 한다. 진정한 소통은 우월성을 따지고, 옳고 그름을 증명하는 논쟁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마음임을 말한다. 가족을 유지시키는 가장 중요한 소통 도구는 사랑인 것이다.
끊임없이 소통에 실패하는 가족이었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형 다니엘은 빌리에게 수어로 ‘사랑해’라고 말한다. 수어로 표현되는 이 아름다운 말은 어쩌면 잘못된 방식이었지만 아버지가 그토록 논리적인 언어로 하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른다. 애초 사랑으로 형성된 가족이라는 부족은 어쩌다가 이렇게 소통이 막혀버린 폭력적인 관계로 전락한 것일까. 연극 '가족이라는 이름의 부족'이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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