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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낙태 합법화의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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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월 28일 캐나다 연방대법원이 낙태를 불법화한 형법을 5대 2로 위헌 판결했다. 1975년 3월, 6대 3으로 형법을 편든 판결을 스스로 뒤집은 거였다. 국민 약 40%가 가톨릭 신자인 캐나다는 그 전까지 낙태 시술한 의사는 최고 종신형, 시술 받은 여성은 최고 2년형을 받아야 했다. 1988년 이후 캐나다 여성은, 원칙적으로 임신 기간 제한 없이 낙태를 선택할 수 있게 됐다.
연방 정부를 상대로 한 두 차례 헌법 소송을 비롯, 커다란 진전을 이루는 데 앞장 선 이가 의사 헨리 모겐탈러(Henry Morgentaler, 1923~2013)였다. 나치 멸절수용소 생존자인 폴란드 출신 유대인 모겐탈러는 1950년 캐나다로 이민, 1953년 몬트리올 의대를 졸업하고 1955년 캐나다 시민권을 얻었다. 나치 치하의 강제 낙태의 만행을 보고 들은 그는 낙태 불법화로 인해 산모의 생명과 안전이 위협당하는 현실 역시 버금가는 불의라 판단했다.
그는 1967년 의회 청문회에서 형법 개정의 당위를 공개적으로 주장하면서 낙태 논쟁의 전면에 등장했고, 자신의 클리닉에서 정관절제수술과 자궁 내 피임기구 삽입술(IUDs), 경구피임약 보급에 힘썼다. 기소 위협을 무릅쓰며 낙태수술도 감행했다. 그해 법무장관이던 피에르 트뤼도는 형법을 개정, 동성애 불법화 조항을 없애는 한편 산모 건강 등에 치명적인 경우 의료진 3인 위원회 승인하에 이뤄지는 낙태는 허용했다.
모겐탈러는 그 개정안도 미흡하다고 판단했고, 자신이 행한 5,000여 건의 성공적 낙태 실적을 공개적으로 천명해 기소되기도 했다. 그는 1970년대 말부터 위니펙과 토론토 등지에 자신의 낙태 클리닉을 잇달아 개설했고, 의료진 100여 명을 양성했다. 법의 위협과 별개로 그는 상시적인 테러 위협에 시달렸고, 그의 병원 앞에는 시위대가 상주하다시피 했다. 그는 1988년 대법 판결을 "여성의 승리이자 상식과 정의의 승리"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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