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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의 정치와 스포츠의 한 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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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4월 29일 박정희 특별담화가 TV와 라디오로 전국에 생중계됐다. '국가 안보와 시국에 관한 특별담화'의 요지는 '지키지 못하면 죽는다'는 거였다. 그는 베트남의 국론 분열과 시민,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가 베트남 패망의 결정적 원인이라며 국민 총화단결을 역설했다. 그리고 "선거철의 사회 혼란과 정국 불안, 행정 공백"으로 국력이 약화된다고도 했다. 1971년 7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간신히 승리한 직후 유신헌법을 제정, 이듬해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선거로 장기집권의 토대를 놓은 그였다.
약 열흘 뒤인 5월 10일 수도 서울에서는, 특별담화에 화답하듯 대규모 '총력안보 서울시민 궐기대회'가 열렸고, 사흘 뒤 '국가안전 공공질서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긴급조치 제9호)가 선포됐고, 6월 24일 국민대를 시작으로 학도호국단이 창단됐고, 7월 16일 방위세법이 제정됐다. 7월 25일 민방위기본법이 제정되고 9월 22일 청와대에서 민방위대 결단식이 열렸다. 초등학생을 비롯한 전 국민이 낸 방위성금으로 사들인 팬텀전투기 5대로 그해 말 '필승 편대'가 창설돼 여의도 하늘을 가로질렀고, 대한불교 조계종도 12월 17일 '호국승군단'이란 걸 발족했다.
태릉선수촌 실내체육관이 그해 11월 17일 개관했고, 이듬해 2월 서독오픈탁구선수권에서 이에리사가 개인 단식에서 우승했고, 7월 몬트리올 하계올림픽에서 페더급 레슬러 양정모가 한국 최초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다.
스포츠인들의 낭보는 '안보 불안'의 피로를 잠시나마 덜어준 쾌거였다. 하지만 누구보다 그들을 반긴 게 군사정권이었다. 베트남전 파병 군인들처럼, 스포츠 영웅들은 태극기 물결 속에 대규모 시민환영대회 연단에 서곤 했고, 1977년 11월 프로복싱 슈퍼밴텀급 챔프가 된 홍수환도 시가지 개선 퍼레이드를 펼쳤다. 만 29세 청년 고상돈(1948.12.28~1979.5.29)의 한국 등반대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서서 "더 오를 곳이 없다"고 포효한 것은 1977년 9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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