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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그깟 거, 하나도 안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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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은 한국 문학의 최전선입니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 나오기 전까지 널리 읽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일보는 '이 단편소설 아시나요?(이단아)' 코너를 통해 흥미로운 단편소설을 소개해드립니다.
“장례식장에서 부고(訃告) 작성하러 ‘아드님’이 오라고 했다. 우린 딸만 넷이라 내가 가겠다고 하니 ‘사위님’을 보내라고 했다. (...) 상조회사 직원도 상주(喪主)를 찾았다. 큰언니가 상주할 거라고 하자 ‘조카라도 계시면 그분이 서는 게 모양이 좋다’고 했다.”
지난 5~6월 서울시가 진행한 ‘이제는 바꿔야 할 의례 문화’ 시민 에세이 공모전에 도착한 사연 중 하나다. 호주제가 폐지된 지 16년이 지났지만 각종 관혼상제에서 주인의 자리는 여전히 남자에게 속해 있다. 왜 아들이어야만 할까. 문학인 4호에 실린 문은강의 단편소설 ‘호랑이가 물어갈’은 이 같은 가부장제에 대한 공고한 미련이, 어쩌면 ‘호랑이가 물어간다’는 모호한 두려움과 같진 않은지 묻는다.
금희는 전북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에서 태어나 옹정리에서 태어난 남자와 결혼해 미숙과 미옥을 낳았다. 미숙이 여섯 살, 미옥이 세 살 되던 해 금희의 남편은 집을 나갔다. 남편이 도망간 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 밥이 질게 되었네 되게 되었네 하는 것으로 구박받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금희는 미숙과 미옥과 함께 옹정리에서 오순도순 살면 됐다. 하지만 금희는 그러지 못했다. 호랑이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호랑이가 마을에 내려왔던 그날, 금희는 어둠 속에서 도깨비불처럼 빛나는 두 눈동자를 봤다. 그것은 금희의 상상에서 존재하는 이미지였으며 동시에 실존하는 동물이었다. 금희는 자신과 두 딸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에 있는 패물과 몇 지기 땅까지 팔아 감나무집 넷째 아들인 건배를 양자로 들인다. 다부진 체격에 우락부락한 성미를 가진, 동네에서 힘이 가장 셌던 건배 덕에 금희는 더 이상 호랑이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됐다.
“남편은 없어도 아들은 있어야 한다”고 금희는 생각했다. 그래서 금희는 건배가 미옥의 뺨을 때려도 건배를 용서했다. “건배 덕분에 제삿밥을 먹을 수 있다”고, “죽어서 배곯는 것만큼 비참한 것이 없다”고 믿었다. 건배한테 집도 땅도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된 뒤에도 건배가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을 놓지 못했다. 하지만 건배는 끝내 금희의 장례식에 오지 않았다.
건배의 배신을 경험했으면서도 금희는 끝내 아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금희의 딸인 미옥과 미숙은 아들을 낳지 못했다. 미옥의 딸인 지연이 겨우 아들인 수호를 낳았을 때, 금희는 지연의 손을 붙잡고 울며 이렇게 말한다. “지연아. 니가 큰일 해냈다. 진짜 아들이다. 아들이야(...)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하지만 건배에 이어 유일한 집안의 남자가 된 수호는 증조외할머니 금희의 상주 되기를 거절한다. 금희는 결국 상주 없는 장례를 치른다. 지연은 “오지도 않을 것을 두려워하면서 평생을 전전긍긍하면서” 살다 죽은 할머니 금희를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호랑이, 그 망할 놈의 호랑이. 그깟 거 이제 하나도 안 무섭다.”
얼마 전 SNS에서 '#성차별없는장례문화가시급합니다’라는 해시태그가 돌았다. 여자는 상주가 될 수 없다는 만류를 뿌리치고 양복과 완장을 얻어낸 여자 상주들의 경험담과 사진을 한참 바라봤다. 그건 외동딸인 나의 미래 모습이기도 했다. 나는 상주가 될 것이다. 호랑이가 진짜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딸들은 호랑이가 나타나도 결코 호락호락 잡혀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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