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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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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인 11월 27일이 그의 탄생 백주년이었다. 많은 매체가 그를 소환해 융숭하게 대접하고 문학세계를 기렸다. 신문을 안 봤으면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나중에 알게 됐으면 왠지 내 삶의 무심함에 자책했을 거 같다.
그는 내 청춘에 박제된 시인이었으니까. 70년대의 문과대생에게 김수영(1921~1968)이라는 이름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지닌 신비한 우상 같은 존재였다. 미팅에 나갈 때 무게 잡는답시고 옆구리에 끼고 다닌 그 시집을 기억한다. 민음사가 포켓판 크기 시리즈로 출간한 ‘오늘의 시인총서’ 첫 시선집 ‘거대한 뿌리’다. 아마도 내 인생에서 돈 주고 산 첫 번째 시집이 아니었나 싶다. 시집 표지에 실린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라는 시구(시 ‘아픈 몸이’에서)를 아직도 잊지 않는다.
그 시절 내 청춘의 지적 허영이라 해도 좋고, 혹은 삶의 나침반처럼 삼은 짧고 강렬한 문장이 몇 개 있었다. 하숙집 책상 앞에 붙여놓았었다.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 그리고 김수영의 시론 제목인 ‘시여, 침을 뱉어라’였다.
그의 얼굴이 그리워 인터넷을 뒤졌다. 전해지는 사진은 몇 가지밖에 되지 않는다. 하얀 러닝셔츠 차림에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비스듬히 앉아 허공을 응시하는, 아마도 40대쯤으로 추정되는 흑백사진이 가장 많이 눈에 띈다.
유난히 짙은 눈썹 아래 형형하게 빛나는 맑은 눈동자, 야윈 뺨, 길게 뻗은 콧날, 꽉 다문 다부진 입술, 깊게 팬 미간 주름, 깎지 않은 수염. 많은 여성 문인을 울렸다는 백석만큼이나 미남이다. 알베르 카뮈나 제임스 딘의 이미지가 언뜻 스친다. 무릇 실존적, 반항적 지식인은 이렇게 생겨야 하는가 보다. 세 사람 다 우연히 교통사고로 한참 때 별이 됐으니 그런 사람들은 다 그렇게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야 하는 숙명인가.
중년의 아재가 된 내가 오늘 김수영을 내 청춘의 서랍 속에서 꺼내 별 메시지 없는 글을 쓰고 있는 이유를 굳이 말하라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냥 막연한 ‘첫사랑’ 같은 거다.
그가 마흔일곱 사후에 한국 문단에 신화처럼 우뚝 선 것은 그의 삶도 시도 여느 시인과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서슴없이 치열했다. 그의 말대로 머리도 심장도 아닌 ‘온몸’으로 밀고 나갔다. 그는 허위를 배척했다. 정직하고 솔직한 육성으로 시를 썼다. 백 퍼센트 순도의 정직이 그의 시가 갖는 힘이다. 후대는 그를 참여시인이라고 부르지만 그는 좌우 어느 쪽도 아니었고 자기 실존과 자존과 생활에 충실한 인간이었다.
많은 기념행사 중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평생 김수영과 윤동주에게 미쳐 살았다는 서울시 환경미화원 김발렌티노씨가 인사동 화랑에서 개최한 ‘아 김수영’전이다. 그가 쓴 시화전 초대의 시 ‘두 형님’이 난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윤동주를 읽으면 더러운 피가 맑아지고/ 김수영을 읽으면 식은 피가 뜨거워져요/ 윤동주 형님은 물로 세례를 주시고/ 김수영 형님은 불로 세례를 주시죠/ 두 형님 고맙습니다/ 진실로 온몸으로 맑고 뜨겁게 살아가겠습니다/ 바람에 스치는 별처럼/ 바람에 일어나는 풀처럼요”(일부 생략).
한때 분명히 김수영이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 우리나라 문학사상 가장 탁월한 문건이라고 일컬어지는 ‘시여, 침을 뱉어라’를 읽으며 이제는 그만 그를 떠나 보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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