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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에는 대한민국 음식 역사가 있다

입력
2021.11.24 22:00
27면
전북 익산 장독정원. 한국일보 자료사진

전북 익산 장독정원. 한국일보 자료사진

식당을 뜻하는 말은 참 많다. 중국집도 식당이고, 실비집과 왕대포집도 식당의 일종이었다. 충청도 일대는 '식관'이라는 말도 많이 썼다. 전국적으로 회관이 널리 쓰인 적도 있었다. 회관은 지금도 노포에서 종종 발견된다. 왜 회관이 식당의 별칭이 되었을까. 꽤 격식 있고 규모가 크며 좀 비싼 음식을 파는 집을 가리켰다. 더러는 유흥 주점을 말하기도 했다. 회관은 뷔페가 등장하기 전 결혼식 피로연이나 단체 모임 장소로 많이 쓰였다. '연회석 완비' '단체예약 환영'이 회관의 모토였다. 대개 '宴會席(연회석)'이라고 써놓았으므로 수없이 길을 다니며 눈에 익어서 시험에 나오더라도 절대 틀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 한자였다. 회관은 주로 한식을 팔았다. 불고기, 곰탕, 갈비 같은 게 주 메뉴였다. 학교 다닐 때 회관집 아들은 도시락 반찬으로 불고기를 싸와서 부러움을 샀다. 물론 팔다가 남은 것이었겠지만, 장조림 반찬도 못 싸오던 시절에 '코끼리표 검정 보온도시락'에 들어 있는 따끈한 불고기는 환상적인 반찬이었다.

얼마 전에 전북 익산을 구경했다. 익산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주로 이리시로 알려졌다. 통합으로 이리와 익산군이 합쳐져서 익산시가 되었다. 이리는 저 먼 기억을 소환한다.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다. 역에서 운송대기 중이던 화약이 터져 도시가 날아갔다. 아직도 그 상처가 이 도시에 남아 있다. 마침 공연 왔던 이주일이 쓰러진 하춘화를 둘러업고 병원으로 내달려 살려냈다던가. 시내에서 멀지 않은 익산 미륵사지를 구경해도 좋겠지만, 나는 그저 이 오래된 근대 도시가 더 마음에 들었다.

이리시는 일제강점기에 성장했다. 일제가 호남선을 깔아서 풍요로운 전북지방의 물자 반출과 이동을 도모했고, 이리는 그 호남선의 중핵이었다. 도시가 형성되었고 돈이 돌았다. 익산역에서 가까운 익산근대역사박물관에는 이 도시의 근현대 성장사가 잘 정리되어 있다. 돈이 도는 도시에는 화교가 몰려들었다. 중국집과 포목점이 열렸다. 놀랍게도 현재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집은 그렇다 치고 화교 포목점이라니. 익산에는 최근, 일제강점시대의 옛 일본인 농장주가 은닉한 금괴 2톤이 묻혀 있다고 소문이 나서 화제가 되었다. 그 건물이 바로 화교학교 자리다. 다른 각도의 얘기지만, 화교들의 자체 학교가 있을 만큼 세력이 컸다는 뜻이다.

나는 전에 익산의 중국집을 오랫동안 찾아다녔다. 변해버린 서울 중국집과 달리, 그곳에는 옛날식 볶음밥과 만두, 짜장면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다. 시장에는 여전히 토렴하는 옛날식 순대국밥집이 손님을 반긴다. 요즘 익산에서 발견한 재미는 회관음식이다. 역전앞 구도심은 이제 많이 쇠락했지만 여전히 과거 이리의 영화를 보여주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중 하나가 회관인데, 대개는 상호를 그리 달고 있는 건 아니고 ‘회관’이라고 부르는 고유한 방식의 음식을 낸다는 뜻이다. 이를 테면 회관 카테고리(?)에 속하는 중앙생선이라는 가게는 일품 음식 하나를 시켜도 한 상 깔아준다. 심지어 꽤 괜찮은 회도 한 접시 나온다. 막무가내로 못 먹을 것까지 구색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어서 마음에 든다. 입맛 나는 반찬을 잘 갖춰 사람 수에 맞게 낸다. 한때 이 동네는 돈과 분 냄새, 주먹이 있었다. 회관은 사라져가고 있지만, 어쩌면 대한민국 음식사회사의 중요한 자리에 있었다. 그걸 기록해둔다.


박찬일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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