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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일해저터널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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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9월 28일, 일본 홋카이도에 혼슈 북단 아오모리현을 거쳐온 열차가 닿았다. 착공 27년 만인 이듬해 3월 공식 개통된 세이칸(?函) 해저터널을 통해서였다. 홋카이도가 비로소 바다가 아닌 육로로 본토와 연결된 거였다. 협궤열차로 시작된 2016년 3월 고속열차 신칸센 규격으로 증설됐고, 수요가 증가하면서 근년에는 자동차 전용 제2터널 구상도 이어지고 있다.
세이칸터널 구상은 동북개발사업의 일환으로 2차대전 이전부터 꾸준히 제기됐다. 해로에만 의존하기엔 홋카이도의 경제·군사적 가치가 너무 컸고 태풍 등 기상 재난도 잦았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기뢰가 해협으로 유입되는 일까지 빚어졌다.
일본 정부는 1961년 3월 심해탐사정 해저 지질조사를 거쳐 1964년 1월 굴착작업을 시작했다. 총 연장 53.85km. 쓰가루 해협을 최대 240m(수평선 기준) 지하로 관통하는 해저부만 23.3km였다. 스위스 알프스 권역의 '고트하르트 바시스 터널'의 2016년 개통 전까지 세이칸터널은 세계 최장 터널이었고, 해저부 37.9km의 '영불터널(Channel Tunnel, 총연장 50.45km)'이 1994년 5월 뚫리기 전까지 최장 해저터널이었다.
세이칸터널보다 먼저 1917년 한일 해저터널 구상이 나왔다. 1923년 하코다테의 한 시의원이 세이칸터널 구상을 발표한 반면, 한일 해저터널은 훗날 내각 총리대신을 지낸 군인 정치인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1880~1950)가 처음 제기, 1930년대 말 '대동아종관철도(大東??貫?道)' 계획의 일부로 구체화됐다. 한반도를 거쳐 아시아-유럽까지 닿겠다는 그 계획은 전쟁, 패전으로 무산됐다.
쓰시마 등 해협의 섬들을 들르며 부산(또는 거제)과 규슈를 잇는 터널은 해저구간만 최소 128km. 양국의 여러 정치인들이 이 구상을 지지하면서도 진전시키지 못한 표면적 이유는 경제성이다. 터널의 역사적 상징성이란 정치적 부담을 감당할 만한 자신만만한 정치인이 없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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