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공국과 공위의 '구원의 천사'

입력
2021.09.14 04:30
0면
구독

9.14 그레이스 켈리

영화 '이창(Rear Window, 1954)'의 그레이스 켈리. 위키피디아

영화 '이창(Rear Window, 1954)'의 그레이스 켈리. 위키피디아


모나코 공국은 유엔 회원국 가운데 가장 영토가 작은 나라다. 공(후)국은 국왕이 아니라 공작이나 후작 작위의 영주가 다스리는 나라지만 제후국과 달리 형식상 주권 국가다. 따라서 1956년 모나코 군주 레니어(Rainier) 3세와 결혼한 그레이스 켈리(1929.11.12~1982.9.14)는 왕비가 아니라 대공비(大公妃)이고, 레니어의 작위는 지금도 공작이지만, 대개 그들을 왕과 왕비라 부르는 까닭은 아마도 순도 높은 로망(roman)의 현실에 불순물이 섞이는 게 싫고, 중세 신분, 계급의 갑옷이 삭을 만큼 삭아 이미 로망의 오브제가 된 까닭일 것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명문가에서 태어나 가톨릭 전통의 학교 교육을 받은 켈리는 고교 졸업 앨범에 잉그리드 버그만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적었다. 수학 점수가 너무 낮아 대학 진학에 실패한 딸이 배우가 되려 하자 사업과 정치로 이미 명사였던 아버지는 당연히 반대했다. 아버지에게 배우는 매춘부나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고 한다. 켈리는 1949년 뉴욕 드라마예술아카데미를 통해 배우가 됐고, '하이눈(52)'과 '이창(54)' 등 1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잇달아 탔다. 그의 결혼 발표는 서사의 절정에 터진 또 한번의 클라이맥스였다.

여의도보다 좁은 공국 모나코의 2차 세계대전 전후 처지는 곤궁했다. 관광·카지노 산업에 의존해온 재정은 전쟁 여파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했고, 1918년 조약에 의해 공위를 계승할 후손이 없으면 프랑스와 합병될 처지였다. 레니어 3세에게 켈리는 동화 속 왕비이기 이전에 공위를 지켜줄 구원의 천사이자 공국을 세계에 알릴 홍보 대사였다. 켈리는 그 역할을 해냈다. 개인소득세가 없는 모나코는, 세계은행 집계 1인당 명목 국민소득이 19만532달러(2019년 기준)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다.

최윤필 기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