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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피아 손에 들어간 ‘렘브란트’ 그림은 어디에 있나

입력
2021.09.10 04:30
수정
2021.09.10 11:04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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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美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도난 사건

편집자주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 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의 유일한 바다 풍경화인 '갈릴리 바다의 폭풍'(1633).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제공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의 유일한 바다 풍경화인 '갈릴리 바다의 폭풍'(1633).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제공

1990년 3월 18일 새벽 미국 매사추세츠주(州) 보스턴은 아일랜드계 최대 축제 ‘성 패트릭의 날’(17일)을 맞아 흥과 취기로 얼큰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도시 한편에 고풍스럽게 자리 잡은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에도 저 멀리서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보스턴 사교계를 주름잡았던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1840~1924)가 유럽에서 수집한 미술품으로 꾸민 이 박물관은 베네치아풍 건물과 아름다운 정원으로도 유명했다.

야간 경비원 릭 애버스는 여느 때처럼 순찰을 마치고 보안 데스크에서 한숨 돌리고 있었다. 오전 1시 24분, 어둠을 뚫고 난데없이 초인종이 울렸다. 문밖엔 경찰 2명이 서 있었다. 그들은 “소란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고 했다. 애버스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별다른 의심 없이 문을 열었다. 그땐 어느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 초인종 소리가 ‘역사상 최대 미술품 도난 사건’을 예고하는 ‘경고음’이었다는 것을.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유명한 네덜란드 화가 페르메이르가 남긴 그림 36점 중 하나인 '연주회'(1663-1666).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제공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유명한 네덜란드 화가 페르메이르가 남긴 그림 36점 중 하나인 '연주회'(1663-1666).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제공


‘렘브란트가 사라졌다’… 81분간 13점 강탈

경찰들은 교대 순찰 중이던 동료 경비원 랜디 헤스탠드를 데려오라고 하더니, 이윽고 두 사람 앞에 ‘체포영장’을 내밀며 보안 데스크 밖으로 나오라고 요구했다. 애버스는 당황해 비상 단추를 누를 생각도 못 했다. 헤스탠드는 턱을 늘어뜨린 채 얼어붙어 버렸다. 경찰들은 두 사람에게 수갑을 채운 뒤 마침내 정체를 드러냈다. “우리는 강도다!” 애버스와 헤스탠드는 머리에 접착 테이프가 둘둘 감겨진 채로 박물관 지하실에 갇혔다.

박물관 동작 감지기에 기록된 도둑들의 행각은 대범했다. 먼저 박물관의 중요 전시실인 2층 ‘네덜란드 룸’으로 향했다. 범인들은 렘브란트의 유일한 바다 풍경화인 ‘갈릴리 바다의 폭풍’(1633)과 ‘검은 옷을 입은 숙녀와 신사’(1633), ‘자화상’ 동판화(1634)를 벽에서 내렸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유명한 페르메이르의 작품 ‘연주회’(1663-1666)에도 손을 댔다. 전 세계를 통틀어 고작 36점에 불과한 그의 그림들 중 하나가 영영 사라진 것이다. 심지어 들고 나가기도 조심스러운 중국 은나라 시대 화병까지 챙겼다.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의 야간 경비원들은 두 팔에 수갑이 채워지고 얼굴엔 접착 테이프가 감긴 채 지하실에 갇혀 있었다.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제공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의 야간 경비원들은 두 팔에 수갑이 채워지고 얼굴엔 접착 테이프가 감긴 채 지하실에 갇혀 있었다.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제공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에서 81분이나 머물며 미술품을 훔친 도둑들의 대담한 행각은 동작 감지기에 기록돼 있다.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제공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에서 81분이나 머물며 미술품을 훔친 도둑들의 대담한 행각은 동작 감지기에 기록돼 있다.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제공

맞은편 ‘쇼트 갤러리’에선 프랑스 화가 드가의 스케치와 수채화 5점을 훔쳤다. 벽에 박힌 나폴레옹 근위병 깃발도 가져가려고 나사를 풀다가 포기하고, 그 대신 깃대 끝 청동 독수리 장식품을 떼어냈다. 다른 명작들도 널려 있는데 굳이 부수적인 장식품을 욕심낸 건 어딘가 의아했다. 1층 ‘블루 룸’에서는 프랑스 화가 마네의 ‘토르토니 카페에서’(1875)가 사라졌다.

도둑들이 박물관에 머문 시간은 무려 81분. 그들은 보안카메라 녹화테이프까지 잊지 않고 챙겨서 유유히 떠났다. 그 뒤로는 도둑들도, 그림들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감금된 경비원들은 아침에 출근한 주간 경비원들이 경찰에 신고한 뒤에야 발견됐다. 도난당한 그림은 총 13점으로 확인됐다. 값어치는 현재 통화가치로 무려 5억 달러(약 5,820억 원)에 이른다.

프랑스 세공사 피에르 필립 토미르가 제작한, 나폴레옹 근위대 깃발의 독수리 청동 장식(1813-1814).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제공

프랑스 세공사 피에르 필립 토미르가 제작한, 나폴레옹 근위대 깃발의 독수리 청동 장식(1813-1814).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제공


미술품을 감형 위한 담보로… 과연 마피아 범행일까

미 연방수사국(FBI)부터 사설 탐정까지 모두 이 사건에 뛰어들어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다. 그러나 동작 감지기 기록만 남았을 뿐, 범인들의 머리카락 한 올도 찾을 수 없었다. 초기엔 경비원 애버스가 의심받았다. 도둑들이 들른 전시실 3곳 중 오직 ‘블루 룸’에서만 동작 감지기에 흔적이 포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발자취는 애버스의 것이었다. 그는 결백을 주장했고, FBI 수사관들도 정황상 혐의점이 거의 없다고 봤다.

곧 수사당국의 관심은 마피아 조직에 쏠렸다. 당시 보스턴에선 아일랜드계 마피아와 이탈리아계 마피아 간 권력 다툼으로 살인, 강도, 마약 등 온갖 흉악범죄가 끊이지 않았다. 마피아 우두머리들은 훔친 그림들을 ‘담보’로 FBI와 협상을 벌여 감형을 받거나 석방되곤 했다. 이번 사건도 감옥 탈출용 카드가 필요한 마피아 일당의 소행일 가능성이 컸다.

용의 선상에 오른 인물 중엔 아일랜드계 마피아 수장 화이티 벌거도 있었다. 과거에도 훔친 미술품을 독립투쟁 중인 아일랜드공화국군(IRA)에 무기 구입 자금용으로 넘긴 혐의를 받았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FBI는 벌거와 보스턴 경찰의 강한 유대관계를 파헤치면 경찰이 조력했거나 가담한 정황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지만, 끝내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프랑스 화가 마네의 '토르토니 카페에서'(1875).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제공

프랑스 화가 마네의 '토르토니 카페에서'(1875).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제공

이탈리계 마피아 조직에선 ‘미국 최고의 미술품 도둑’ 마일스 코너가 의심받았다. 1975년 보스턴미술관에서 훔친 작품과 신변의 자유를 맞바꿨던 ‘전설 속 주인공’이었다. 가드너 박물관 사건 당시엔 다른 범죄로 수감 중이었는데, 그는 과거에 미술품 도둑질을 함께했던 친구 바비 도나티를 지목했다. 그러나 도나티는 1991년 내부 권력 다툼 도중 살해당하고 말았다. 코너는 도나티가 은닉한 미술품이 골동품 판매상인 영워스에게 맡겨졌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실제로 영워스는 자신이 도나티의 미술품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1997년에는 지역언론 보스턴헤럴드 기자 톰 매시버그를 깊은 밤 으슥한 창고로 불러내 렘브란트의 ‘갈릴리 바다의 폭풍’을 직접 보여주기도 했다. 이튿날 매시버그는 체험기를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었다. 헤드라인은 이러했다. “우리는 봤다!” 그러나 영워스가 증거로 보낸 물감 조각을 분석한 결과, 렘브란트 시대 것이긴 하지만 그림에 사용된 종류는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

수사는 그렇게 제자리를 맴돌았고 속절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그러다 2010년 결정적 제보가 들어온다. 제보자는 도나티와 함께 범행을 계획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피아 조직원 로버트 구아렌테(2004년 사망)의 아내 엘렌이었다. 그는 “남편이 생전에 미술품 일부를 소유했고, 암투병을 시작한 뒤 동료 로버트 젠타일에게 보관을 부탁했다”고 주장했다. FBI는 2012년 젠타일을 마약 혐의로 기소한 뒤 미술품 행방을 캐물었다. 거짓말 탐지기 조사도 동원해 압박했다. 또 코네티컷주 맨체스터에 있는 자택을 급습, 바닥까지 뜯어내 수색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허탕이었다.

유럽에서 수집한 미술품으로 미국 보스턴에 박물관을 연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사진(1888).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제공

유럽에서 수집한 미술품으로 미국 보스턴에 박물관을 연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사진(1888).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제공


빈 액자가 걸린 미술관… 추적은 끝나지 않았다

2013년 FBI는 중대 발표를 한다. 범인들은 뉴잉글랜드 지역 일대 범죄조직 소속이고, 미술품들은 코네티컷주 도시들과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로 옮겨졌다는 내용이었다. 2015년에는 두 범인이 사망했다는 추가 정보도 공개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여전히 범인의 신원과 미술품 행방은 미궁에 빠져 있다.

사건 자체도 의문투성이다. 미술품 도난 사건은 대부분 3분 안에 범행이 끝난다. 하지만 이 사건 범인들은 시간 여유가 충분하다는 걸 미리 알기라도 한 듯, 무려 81분이나 제 집 안방처럼 박물관을 누볐다. 편하게 액자째 가져가지 않고, 굳이 그림을 틀에서 잘라내는 번거로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유화는 물감이 두껍게 발라진 터라, 돌돌 말아서 가져갈 수도 없는데 말이다. 분명 값비싼 작품들을 노렸을 텐데, 박물관에서 가장 귀한 르네상스 걸작 ‘에우로페의 납치’를 왜 그냥 놔뒀는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도난당한 그림 자리에 빈 액자가 걸려 있는 네덜란드 전시실 풍경.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제공

도난당한 그림 자리에 빈 액자가 걸려 있는 네덜란드 전시실 풍경.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제공

박물관에는 빈 액자가 그대로 벽에 걸려 있다. 설립자 가드너가 미술품 배치를 보존하지 않으면 모든 자산을 하버드대에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빈 액자는 이 박물관을 상징하는 대표 이미지로 자리매김했다. 박물관은 보상금 1,000만 달러(117억 원)를 내걸고 지금도 제보를 받고 있다. 깃대 독수리 장식품에는 별도 보상금 10만 달러(1억 원)도 책정돼 있다. 2005년부터 박물관 보안 책임자로 일하는 앤서니 아모레는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의 진정한 가치가 도난 사건의 선정성에 묻힐까 걱정된다”며 “대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건 비극”이라고 말했다.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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