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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 얘기 같지 않은 '길가메시 문제'

입력
2021.08.15 18:00
수정
2021.08.15 18:03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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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이라크에서 밀반출돼 미국 워싱턴 성서박물관에 전시 중인 '길가메시 사서시' 가운데 꿈을 다룬 점토판. 미 당국은 최근 반환 결정을 내린 불법 반출 문화재 1만7,000여 점 가운데 이 점토판을 포함시켰다. AP=연합뉴스

이라크에서 밀반출돼 미국 워싱턴 성서박물관에 전시 중인 '길가메시 사서시' 가운데 꿈을 다룬 점토판. 미 당국은 최근 반환 결정을 내린 불법 반출 문화재 1만7,000여 점 가운데 이 점토판을 포함시켰다. AP=연합뉴스

이라크 전쟁 때 밀반출된 문화재 가운데 1만7,000여 점이 최근 미국에서 반환 결정이 났다. 가장 주목받는 건 ‘길가메시 서사시’ 가운데 꿈을 기록한 점토판. 3500년 전 아카드어로 새겨졌는데 신이 인류를 심판키로 한 사실을 꿈을 통해 알려주는 내용이다. “세상의 재물을 버리고 네 영혼을 구하라. 네 집을 부수고 배를 만들어라.” 대홍수, 에덴동산을 구약성서보다 먼저 다룬 것이 흥미롭다.

□ ‘길가메시 서사시’는 기원전 2800~25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도시국가 우루크를 다스린 왕 길가메시의 이야기다. 그는 우루크를 번성시켰으나 아버지에게서 아들을, 어머니에게서 딸을 빼앗은 폭군이었다. 절망한 사람들이 울부짖자 신들은 새 영웅 엔키두를 만들어 둘이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도록 했다. 초기엔 엔키두가 길가메시의 폭력을 막아 절대권력이 사라지는 듯했으나 현실은 반대였다. 둘은 격투를 벌이다 결국 손을 잡아 친구가 되었고 하늘의 뜻을 거역하고 모험을 즐기게 된다.

□ 이 같은 이야기는 처음엔 수메르어, 바발로니아 시대에는 아카드어로 점토판에 쓰였다. 뒤늦게 19세기 말 발굴돼 세상에 공개되자 호메로스 서사시 ‘일리아스(Ilias)’보다 1500년이나 앞선 인류 최고(最古) 기록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할머니 무릎을 베고 듣던 옛이야기와 달리 인간의 도전과 운명, 사랑 같은 현대적 주제를 파노라마처럼 다룬 점이다. 한 고대인의 삶과 죽음의 긴 이야기가 오늘날 작가, 학자에게 영감을 주는 시공을 초월한 소재로 남아 있는 이유다.

□ 길가메시에 매료됐던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은 여기서 소재를 가져와 ‘자비바와 왕’이란 연애소설을 짓기도 했다. 터키 출신의 매사추세츠공과대(MIT) 대런 애스모글루 교수는 권력과 자유의 관계를 ‘길가메시 문제’로 명명했다. 엔키두가 길가메시의 친구가 된 것처럼 제도가 권력으로부터 자유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문제 의식이다. 다시 말해 자유란 견제와 균형의 도플갱어 식 해법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얻어내는’ 것이란 주장이다. 길가메시를 피하려다 엔키두를 만나곤 하는 우리의 정치에도 시사점을 던지는 고대 이야기다.

이태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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