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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의 뒤를 노린 총탄... '스웨덴의 가장 긴 밤'이 시작됐다

입력
2021.08.13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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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올로프 팔메 스웨덴 총리 암살 사건

편집자주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 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현직 총리가 쓰러졌다. 괴한의 총탄에 맞았다. 부인과 함께 시내 극장을 찾았다가 귀가하던 길이었다. 범인은 어둠을 틈타 총리 부부에게 총을 난사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경호원도 없었다. 30년이 넘도록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스웨덴의 가장 긴 밤’은 그렇게 시작됐다.

올로프 팔메 스웨덴 총리가 괴한의 총격을 받고 숨진 이튿날인 1986년 3월 1일, 이 사건 현장인 스웨덴 스톡홀름 스베아바겐-투넬가탄 교차로에 혈흔이 남아 있다. SIPA PRESS 자료사진

올로프 팔메 스웨덴 총리가 괴한의 총격을 받고 숨진 이튿날인 1986년 3월 1일, 이 사건 현장인 스웨덴 스톡홀름 스베아바겐-투넬가탄 교차로에 혈흔이 남아 있다. SIPA PRESS 자료사진


영화 보고 귀가하던 총리, 총에 맞다

1986년 2월 28일 오후 11시 21분. 올로프 팔메 당시 스웨덴 총리는 부인 리스베트 여사와 함께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 시내에 위치한 ‘그랜드 시네마’ 극장에서 영화를 본 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역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다가온 한 남성이 권총을 꺼내 총리 부부에게 수차례 총격을 가했다. 리스베트 여사는 총상을 입긴 했어도 다행히 생명엔 지장이 없었다. 문제는 팔메 총리였다. 등에 총을 맞은 그는 중태에 빠졌다.

인근을 지나던 택시기사가 먼저 신고했다. 행인들도 총리 부부에게 몰렸다. 그사이 범인은 현장을 떠났다. 총리 부부의 경호원이 그 자리에 없었던 탓이 컸다. 팔메 총리는 평소에도 경호원 없는 사생활을 즐겼다. 소탈한 성격, 격식을 차리지 않았던 성향 때문이었지만, 비상사태 시에도 총리를 구할 수 없는 결과가 초래된 셈이다. 행인들마저 최초엔 피해자가 총리 부부임을 몰랐을 정도였다. 팔메 총리는 주변을 지나가던 구급차로 병원에 후송됐으나, 끝내 자정을 조금 넘긴 3월 1일 오전 0시 6분, 피격 45분 만에 사망 선고를 받았다. 향년 59세였다.

올로프 팔메 스웨덴 총리 피격에서 사망까지. 그래픽=김대훈 기자

올로프 팔메 스웨덴 총리 피격에서 사망까지. 그래픽=김대훈 기자


수사에 착수한 경찰이 확보한 단서는 사건 현장 인근에서 회수한 두 발의 총탄뿐이었다. 총탄 성분은 팔메 총리와 리스베트 부인의 옷에 묻어 있던 납 조각과 일치했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3년 전인 1983년 모카피아르트 우체국 강도 사건에서 발견된 총탄과도 일치했다. 스미스웨슨제 리볼버 권총용 총알이었다. 2년 후인 1988년, 리스베트 여사는 사건 당시 자신이 목격한 암살범으로 알코올 중독자이자 마약 중독자인 ‘크리스터 페테르손’이란 사람을 지명했다.

하지만 결정적 증거는 없었다. 마땅한 살해 동기를 찾기도 힘들었다. 리스베트 여사의 기억이 사실과 일치한다는 객관적 확인도 부족했다. 결국 페테르손은 무죄로 풀려났다. 경찰은 수사를 계속했으나 진실에 다가가지 못했다. 대신 비뚤어진 영웅 심리를 뽐내려 하는 부나비들만 속출했다. “내가 팔메를 죽였다”며 범인을 자처한 사람만 100여 명에 달했지만, 경찰에 출석한 뒤엔 모두들 ‘거짓말이었다’고 말을 뒤집었다. 수사는 난항에 부딪혔고 이내 지지부진해졌다. 범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올로프 팔메 스웨덴 총리의 피격 사망 사실을 1면에 담은 1986년 3월 1일 자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 1면. NYT 캡처

올로프 팔메 스웨덴 총리의 피격 사망 사실을 1면에 담은 1986년 3월 1일 자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 1면. NYT 캡처


국외로도 뻗친 '정치적 암살' 의혹, 배후는?

우발적인 단순 살인이라기보단 '정치적 암살'이라는 의혹이 커졌고, 살해 배후를 둘러싼 의문은 해외로도 뻗어 나갔다. 스웨덴의 중립 성향을 공고히 한 인물이 팔메 총리였기에, 냉전의 양대 축이었던 미국과 소련(현 러시아) 모두 의심의 대상이 됐다.

먼저 팔메 총리가 장관으로 재임하던 시절, 베트남전과 관련해 미국을 강력하게 비판한 게 암살 원인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팔메 총리는 미국의 1972년 크리스마스 베트남 폭격에 대해 ‘학살’이라는 수위 높은 표현을 써 가며 맹비난했다. 헨리 키신저 당시 미 국무장관이 “소련이나 중국보다도 (비난이) 거세다”면서 주스웨덴 미국 대사를 철수시켰을 정도다. 팔메 총리는 총리직에 오른 뒤에도 “나는 미국 유학 시절에 미국의 문제점을 보고 사회주의자가 되었다”고 했다. 미국이 중남미와 아시아 등에서 극우 세력 군부 독재 정권을 지원했다는 이유였다. ‘미국의 정보요원이 팔메 총리를 살해한 것’이라는 설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소련도 이유는 충분했다. 강경한 반핵주의자였던 팔메 총리는 모든 유럽 국가의 핵무기 보유 금지를 역설하면서 “소련의 존재 때문에 유럽이 비핵화를 못 한다”는 주장을 폈다. 게다가 암살 시기가 절묘했다. 1986년 3월, 팔메 총리는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비핵화 회담에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회담을 1개월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 살해된 것이다.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가 개입했다는 입소문이 퍼졌다.

남아프리카공화국도 의심을 샀다. 팔메 총리가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 ‘아파르트헤이트’를 강도 높게 비난해 왔다는 이유였다. 사건 1주일 전인 1986년 2월 21일 연설에서 그는 “아파르트헤이트는 인류를 좀먹는 제도로, 우리는 남아공 흑인 민중을 지지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고립시켜야 한다”고 말하며 남아공을 정조준했다. 심지어 “우리는 이 역겨운 제도를 뿌리 뽑는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 아파르트헤이트는 개혁의 대상이 아닌 제거의 대상”이라고도 했다. 당시 남아공의 백인 정권이 정보기관을 동원, 팔메 총리를 암살했을지 모른다는 음모론이 제기됐다. 그러나 아무것도 확인되진 않았다.

스웨덴 당국이 올로프 팔메 총리 암살 사건의 진범이라고 밝힌 스티그 엥스트롬이 사건 이후 언론과 만나 현장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엥스트롬은 수사 초기 용의선상에 올랐으나 명백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AFP 자료사진

스웨덴 당국이 올로프 팔메 총리 암살 사건의 진범이라고 밝힌 스티그 엥스트롬이 사건 이후 언론과 만나 현장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엥스트롬은 수사 초기 용의선상에 올랐으나 명백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AFP 자료사진


재수사 결론은… “유력 용의자 이미 숨져”

사건 발생 18년 만인 2004년, 최초 용의자로 지목됐던 페테르손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페테르손이 숨진 후 그의 친구인 게르트 필킹이 “페테르손이 ‘내가 범인’이라고 털어놨다”고 말하면서다. 논란은 재점화했지만, ‘스모킹 건’(결정적 증거)은 하나도 없었다. 익명의 제보로 모카피아르트 우체국 강도 사건과 팔메 총리 암살 사건에서 사용된 총이 스웨덴의 한 호수에서 발견됐으나 소용 없었다. 시간이 너무 흘러 지문을 찾을 수 없었다. 필킹의 주장을 확인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스웨덴의 살인사건 공소시효는 25년이었던 터라, 팔메 총리 암살 사건의 공소시효도 2011년 2월 28일부로 만료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스웨덴 정부는 이 사건 수사를 계속 수사하기 위해 만료 1년을 앞둔 2010년, ‘사안이 심각한 특정 범죄’에 한해선 공소시효 25년 규정을 없애기로 법을 개정했다. 뒤이어 2016년 스웨덴 수사당국은 사건 발생 30년을 맞아, 팔메 총리 암살 사건 재수사에 나섰다.

그런데 4년간의 재수사를 거쳐 2020년 6월 내려진 결론은 당초 예상과 달랐다. 페테르손이 아니라, 암살 현장에 있었던 ‘스티그 엥스트롬’이라는 인물이 범인으로 지목됐다. 그러나 그는 이미 숨진 상태였다. 재수사를 지휘했던 검사는 “엥스트롬이 사망한 상태라 (기소) 절차를 시작할 수 없다”며 “수사를 중단한다”고 밝혔다. 스테판 뢰벤 당시 총리는 “검찰은 사건의 바닥까지 철저히 추적했다”고 설명했다.

사실 엥스트롬은 이 사건 초기부터 용의자로 꼽혔다. AP통신은 엥스트롬이 암살 현장에 처음부터 있었다며 “잠시 용의자로 간주되기도 했던 인물”이라고 전했다. 다만 주변 인물들의 증언이 엇갈렸고, 명백한 증거도 없어 용의선상에서 벗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엥스트롬은 “나는 처음부터 현장에 있었다”며 “팔메 총리를 살리려고 시도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심지어 스웨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건 현장을 설명하는가 하면, 경찰 수사 방향을 비판하기도 했다고 AP통신은 덧붙였다.

진실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다. 수사당국이 파악한 유력 용의자가 세상을 떠난 만큼 팔메 총리의 정책에 반감을 품은 열강의 사주였는지, 팔메 총리한테 개인적 원한을 품은 사람의 단독 범행인지, 그도 아니면 뚜렷한 이유 없는 우발적 범행이었는지, 이 사건은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스웨덴은 열렬한 지지를 보냈던 지도자를 잃은 비극을 ‘미제 사건’으로 남길 수밖에 없게 됐다.

올로프 팔메의 얼굴이 담긴 스웨덴 기념우표. 스웨덴 우정당국은 팔메 총리 서거 이후 고인을 기리는 의미를 담은 우표를 발행했다.

올로프 팔메의 얼굴이 담긴 스웨덴 기념우표. 스웨덴 우정당국은 팔메 총리 서거 이후 고인을 기리는 의미를 담은 우표를 발행했다.


김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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