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섬마을에 독립운동가만 89명… 노란 무궁화로 피어난 바다의 의병

입력
2021.08.11 04:30
<121> '항일운동의 성지' 완도 소안도와 당사도

완도 소안도 남쪽의 작은 섬 당사도. 1909년 35인의 해상 의병이 일제의 물자 반출에 길잡이 역할을 하는 등대를 습격해 시설을 파괴했다. 이 사건은 소안도 항일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잔치는 끝났다. 선수들은 최선을 다했고, 국민들은 아낌없는 응원을 보냈다. 메달 색깔이나 성적과 상관없이 모두가 즐긴 2020도쿄올림픽이었다. 꼭 이겨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한결 누그러진 마음으로 스포츠 자체를 즐길 수 있었다는 건 또 다른 성과다. 며칠 후면 8ㆍ15, 다시 광복절이다. 삼일절과 광복절마다 애국심을 강조하는 기저에는 일본과의 경쟁의식과 애써 외면한 자격지심이 깔려 있는 것도 사실이다. 76년이 지난 지금, 아픈 과거를 돌아보는 마음도 조금은 너그러워졌다. 민족적 울분을 앞세우기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의 뜻을 차분하게 되새기고 기억하는 날이다. 전라남도 끝자락 완도군 소안도도 그런 곳 중 하나다.


독립운동가만 89명... 소안도의 항일운동

5일 완도 본섬 화흥포항에서 소안도로 가는 배는 여름휴가 극성수기임에도 불구하고 이용객이 많지 않았다. 차량을 실은 1층 주차 공간은 여유가 있었고, 2층 객실도 충분히 거리를 두고 앉을 정도였다. 많지 않은 승객의 대부분이 중간 기착지인 노화도에 내리자 배 안은 더욱 한산해졌다. 3층 갑판에는 비와 햇빛을 가리는 천장이 설치돼 있었지만, 이따금 2~3명의 승객만 올라와 바닷바람을 맞으며 폭염을 식힐 뿐이었다. 코로나19 대유행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소안도는 아직까지 관광지로 별로 알려지지 않아 평소에도 여행객이 많지 않은 섬이다.

소안도 가는 배에서 본 황간도의 바위 산. 맞은편에서 보면 영락없이 거북 모양인데, 주민들은 사자바위라 부른다.


소안도 가는 배에서 본 구도. 소안면에 속하지만 노화도와 다리로 연결돼 있다. 최근에는 김봉진 배달의민족 대표의 고향으로 더 알려져 있다.


완도 화흥포항에서 소안도까지는 대한·민국·만세호 3척의 배가 약 1시간 간격으로 운항한다.

소안항에 내리면 가장 먼저 높은 깃대에 펄럭이는 대형 태극기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아래 창고로 보이는 작은 건물엔 태극기 그림과 함께 ‘항일운동의 성지’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섬 중심지인 가학리로 가는 도로변엔 무궁화 가로수가 심겨져 있고, 특별한 날이 아닌데도 집집마다 태극기가 걸려 있다. 예사롭지 않은 풍경이다.

궁금증은 가학리 한가운데에 있는 ‘소안항일운동기념관’에서 풀린다. 항일운동기념탑이 높이 솟아 있는 양쪽에 두 개의 건물이 있다. 기념관과 ‘사립소안학교’다. 기념탑 앞에 ‘토지소유권 반환투쟁 승리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일제는 대한제국이 국권을 상실한 1910년 이전에 이미 소안도에 대한 토지 조사를 마쳤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후손인 이기용이라는 인물에게 자작 지위를 부여하고 토지를 넘겼다. 이에 소안도 주민들은 1909년 토지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하고, 13년 가까이 서울까지 오가며 법정 싸움을 벌인 끝에 1921년 최종 승소했다. 나라의 주권이 일제에 빼앗긴 시기였음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승리였다. 그만큼 주민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똘똘 뭉쳤다는 의미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일제강점기 동안 6,000여 명의 섬 사람 중 800명이 불령선인(불온하고 불량한 조선사람)으로 낙인찍혀 감시를 받았다. 당시 가구당 인구수를 감안하면 모든 집이 감시 대상이나 마찬가지였다.

토지반환소송에서 이긴 주민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모든 원인이 못 배워서 나라를 잃었기 때문이라 진단하고, 가구당 70원을 모금해 1923년 신식 교육기관인 사립소안학교의 문을 열었다. 전체 모금액이 1만454원으로 당시로는 비행기 한 대 값이었다고 한다.

소안항에 내리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그림이다. 마을의 모든 집이 평시에도 태극기를 걸어 놓고 있다.


소안항일운동기념관 공원에 복원한 사립소안학교. 1923년 토지반환청구소송에서 승소한 주민들의 모금으로 세워진 학교다.


소안항일운동기념관 앞의 '토지소유권 반환투쟁 승리기념비'. 13년간의 끈질긴 법정 투쟁에서 승소한 것을 기리는 비석이다.

이후 소안학교는 폐교와 복교를 거듭하며 항일독립운동의 구심으로 자리 잡았다. 핵심 인물은 송내호(1895~1928)였다. 그는 1922년 비밀결사인 수의위친계(守議爲親契), 1923년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배달청년회, 1924년 소안노농연합대성회, 1926년 살자회, 1927년 일심단을 조직해 항일운동을 이어나갔다. 그 영향을 받아 1930년대에는 고금도, 금일도, 신지도 등 완도 각 섬에서도 항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일제강점기 내내 이어진 항일운동으로 소안도가 배출한 독립운동가가 89명에 이르고, 그중 21명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소안항일운동기념관은 이들의 헌신을 기리는 공간이자 소안도의 독립운동사를 알리는 전시관이다.

기념관을 건립하는 과정도 제2의 독립운동이나 다름없었다. 소안도 항일운동은 당시 신문에도 대서특필할 정도로 주목을 받았지만, 광복 후 차츰 잊히고 말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주민들은 1988년 ‘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소안노인회에서 농악대 공연 등으로 성금 모금에 나서 4,000만 원을 모아 1990년 소안초등학교 앞에 ‘소안항일운동기념탑’을 세우게 된다. 2000년에는 추가로 2억 원의 성금을 모아 옛 소안학교 터를 매입해 완도군에 기부 채납하고 기념관을 건립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제야 당국에서 나서서 기념관을 건립하고, 사립소안학교를 복원하고 기념탑을 준공했다. 광복 60년이 지난 2005년이었다.

1990년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건립한 소안항일운동기념탑. 이후 기념관 앞에 새 탑을 세워 소안항일운동기념탑은 2개가 됐다.


소안항일운동기념관 공원의 황근(일명 노랑무궁화). 소안도 자생종이어서 항일운동의 상징 꽃으로 가꾸고 있다.

기념관 주변 공원에는 흔히 보는 분홍색 무궁화와 함께 노란색 무궁화도 심겨져 있다. 정식 명칭은 황근이지만, 색깔 때문에 ‘노란무궁화’ 혹은 ‘노랑무궁화’로도 불린다. 나라꽃 무궁화의 원산지가 중국 남부나 인도로 추정되는데 비해, 노랑무궁화는 제주와 전남 섬 지역에서 발견되는 자생종이다. 소안도에도 오래전부터 서식하던 식물이어서 나라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는 상징으로 가꾸고 있다.


112년 전 그 섬에 무슨 일이…

토지소유권 반환투쟁 승리기념탑과 나란히 ‘당사도등대 의병의거비’가 세워져 있다. 당사도는 소안도에서 남쪽으로 3.5km 떨어진 작은 섬이다. 공식적으로 25가구에 4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 상주하는 주민은 20명 남짓하다. 100여 년 전에도 주민이 50명에 불과했던 이 작은 섬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섬의 동남쪽 끄트머리 높이 약 70m 깎아지른 해안 절벽 위에 당사도 등대가 있다. 근래에 세운 키 큰 등대 옆에 1909년 처음 세운 아담한 등대가 함께 있다. 일제가 서해에서 남해로 이어지는 바다 길목에 자국의 상선과 군함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했다. 그렇잖아도 마구잡이 어획에 곡물과 광물, 목재 등 조선의 물산을 수탈당하고 있다고 여긴 주민들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당사도 동남쪽 절벽 위의 당사도 등대. 왼쪽 작은 등대가 1909년 일제가 처음 세운 등대다.


아담하고 예쁘게만 보이는 당사도등대. 112년 전 일제 수탈에 항거하기 위해 해상 의병 35인이 새벽에 급습해 시설을 파괴했고, 그 과정에서 관리인이 살해된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1909년 2월 24일 살을 에는 찬바람이 불던 새벽 4시 30분, 해상 의병 35인은 이 등대를 습격해 시설을 파괴하는 의거를 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등대 간수인 기쿠치 쓰네키치가 사망하고, 다른 등대 관리원과 가족 등 5인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목표경찰서와 관세청이 경무국장에게 보낸 상황보고서로 확인된다. 35의병에겐 울분에 찬 의거였지만, 보고서의 그들은 비도(匪徒) 혹은 폭도(暴徒)였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조선 정부에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이완용 내각총리대신이 1,704원을 배상금으로 지급했다는 문서도 최근 발견됐다.

당시 의거를 주도했던 소안도 주민 이준하 외 3명은 청산도로 끌려가 일본헌병대에 의해 처형당했다. 주권을 잃은 백성의 설움을 안팎으로 겪어야 했던 이 사건은 소안도 항일운동의 도화선으로 이어졌다.

사건 보고서에는 당사도 등대가 아니라 ‘항문도(港門島)’ 등대로 표기돼 있다. 일본인이 붙인 명칭으로 항구가 열리는 문이라는 의미다. 어감이 좋지 않아 바꾼 이름이 하필 자지도(者只島)였다.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섬이라는 뜻이다. 1530년 동국여지승람에는 왼쪽 끝자락에 있다는 의미로 좌지도(左只島)라 했는데, 발음만 비슷하게 잘못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1982년 섬의 명칭은 현재의 당사도로 바뀌었다. 청해진을 설치한 장보고가 당나라로 건너갈 때 무사를 기원하며 고사를 지냈던 곳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더한 이름이다.

당사도 앞바다는 오랜 옛날부터 서해와 남해를 잇는 주요 길목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당연히 이 바닷길을 통해 조선의 물산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사도등대 옆의 '조난기념비'. 일제가 당사도등대 습격 사건으로 희생된 일본인 관리인을 추모하기 위헤 세운 위령비다. 광복 후 훼손된 채 땅속에 묻힌 것을 다시 세웠다. 역사의 기억이다.


날이 좋으면 당사도 등대에서 추자도의 여러 섬이 신기루처럼 보인다. 직선으로 약 30km 떨어져 있다.


등대 옆에는 완도군에서 세운 항일전적비와 나란히 귀퉁이가 깨지고 글자가 뭉개진 비석 하나가 보인다. 1910년 일제가 세운 ‘조난기념비’다. 당시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일종의 위령비인데, 광복 후 땅에 묻힌 것을 꺼내 다시 세웠다. 항일독립운동 정신과 시대적 비극을 역사적 교훈으로 기억하기 위한 후세의 선택이다.

소안도ㆍ당사도 여행 정보.

소안도 가는 배는 완도 본섬 화흥포항에서 출항한다. 항일운동의 섬 소안도를 상징하는 대한·민국·만세호 세 여객선이 1시간 간격으로 하루 12회 운항한다. 소안도까지는 1시간 남짓 걸리는데, 중간에 노화도 동천항을 거친다. 노화도는 고산 윤선도 유적이 있는 보길도와 다리로 연결돼 있다. 소안도 여행을 위해서는 차량이 필수다. 소안항에서 남쪽 끝 진산리 마을까지 거리는 10㎞가 넘는다. 편도 승선료는 7,700원, 차량 2만 원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소안도 맹선리 상록수림. 24종 776그루의 상록활엽수가 숲을 이루고 있다.


소안도의 진산리 몽돌해변. 휴가철이지만 여행객은 없고 물질을 끝낸 주민들이 한가로이 쉬고 있다.


소안도 미라리해변. 천연기념물인 상록수림에 둘러싸인 아담한 몽돌해변이다.


소안도 미라리해변. 파도에 돌 구르는 소리가 청량하다.


소안도 해안도로 물치기미 전망대에서 멀리 당사도가 보인다.


소안도는 관광객이 많지 않은 조용한 섬이다. 섬 서편에 진산리해변, 동편에 미라리해변이 있다. 모두 아이 주먹만 한 자갈이 수북하게 쌓인 몽돌해변이다. 파도가 밀려왔다 쓸려갈 때마다 자갈 구르는 소리가 예술이다. 해수욕도 좋지만 자연의 화음 속에 조용하게 ‘물멍’ 하기 딱 알맞은 곳이다. 미라리와 맹선리 상록수림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규모는 작지만 육지에서 보기 힘든 아열대 숲을 경험할 수 있다. 서남쪽 해안도로 물치기미 전망대에서는 멀리 당사도가 조망된다.

당사도는 관광객의 접근이 쉽지 않은 섬이지만, 등대로 가는 길에 스탬프투어 안내표지판이 설치돼 있다.


당사도등대 아래 옛 집터의 돌담이 무너진 석성처럼 남아 있다.


당사도등대로 가는 길 역시 이국적인 난대림 숲길이다.


당사도는 마을에서 등대까지 직선거리 1㎞에 불과한 작은 섬이지만, 여행에는 꼬박 하루를 투자해야 한다. 드나드는 배가 소안항에서 하루 두 차례(오전 7시 50분, 오후 4시)만 운항하기 때문이다. 당사항에서 마을을 거쳐 등대까지는 30분가량 걸린다. 후박나무 동백나무 등 울창한 난대림 숲을 걷는 길이다. 등대에서 서남쪽으로 내려다보면 수평선에 추자도의 여러 섬이 신기루처럼 떠있다. 날이 좋으면 한라산도 보인다. 직선으로 약 60㎞ 떨어져 있다.


소안도(완도)=글∙사진 최흥수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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