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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뒤굴·김녕굴…1만년 ‘불의 길’ 칠흑의 신비를 엿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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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가 세계적인 관광지가 될 수 있었던 건 화산 분출에서 비롯한 아름다운 자연 덕분이다. 작은 섬에 360여 개의 오름과 160여 개의 용암동굴이 분포하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화산박물관'이라 할 만큼 다양하고 독특한 지형으로 제주는 2002년 생물권보전지역, 2007년 세계자연유산, 2010년 세계지질공원 등재까지 유네스코 3관왕에 오르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한라산천연보호구역, 성산일출봉 응회구, 거문오름용암동굴계는 특히 희귀한 지형으로 보존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조천읍 거문오름에서 구좌읍 월정리 해변까지 이어지는 거문오름용암동굴계는 지금도 엄격하게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거문오름은 거문오름용암동굴계의 모태다. 약 9,000년 전 이곳에서 분출된 용암이 월정리 해변까지 14㎞를 흐르면서 10개의 동굴이 형성됐고, 8개가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
제주의 일반 관광지와 달리 거문오름은 하루(화요일 휴무) 탐방 인원을 450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에는 이마저도 절반으로 줄여 현재 225명만 들어갈 수 있다. 최소 하루 전 제주세계자연유산센터 홈페이지에서 예약해야 한다. 예약을 마쳐도 절차가 까다롭다.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30분 간격으로 분산 출입한다. 탐방안내소에서 출입증을 받아 해설가와 동행해야 한다. 등산용 지팡이는 물론 우산과 양산도 소지할 수 없다. 물을 제외한 음식물은 당연히 반입 금지다. 식생과 지질에 영향을 미칠 요소를 사전에 막기 위해서다. 정상코스(1.8㎞), 분화구코스(5.5㎞), 전체코스(10㎞)로 나뉘는데, 전체코스의 경우 약 3시간 30분이 걸린다.
시작 지점은 삼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이다. 길 양쪽으로 푸르스름한 이끼를 머금고 하늘로 쭉쭉 뻗은 삼나무가 신선한 기운을 선사한다. 육지에서는 남부지역 일부에서만 볼 수 있지만 제주에서는 흔한 방풍림이자 녹색 숲길이다. 가지런한 모습이 보기에도 좋고, 피톤치드 방출량도 많아 건강 숲으로 여기지만, 제주 주민들에겐 애물단지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꽃가루가 날리면 철이면 알레르기와 아토피로 고생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목재 덱으로 이어진 계단을 조금 오르면 바로 산 능선이다. 서쪽으로 한라산 정상이 보인다는데, 구름에 가려 확인할 수 없었다. 구름 아래 넓게 펼쳐진 초지에서 중산간의 평화로움을 짐작할 뿐이다. 바로 옆에는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파놓은 갱도진지 흔적이 남아 있다. 제주의 오름 전체에 120여 개나 되고, 거문오름에만 10개 넘게 있다고 한다. 거문오름은 해발 456m에 불과하지만 정상 능선에서 보이는 풍경은 어떤 오름보다 넓다. 360여 개에 달하는 제주 오름의 3분의 1이 보이고, 제주항에서부터 섬 동쪽 남원 앞바다까지 시원하게 조망된다. 일본군이 군사요충지로 여겨 6,000여 명이나 주둔한 이유다.
북측으로 난 전망대에서는 월정리 해변까지 이어지는 거문오름용암계의 윤곽이 어렴풋이 보인다(물론 전문가들은 뚜렷하게 구분된다고 말한다). 오름을 만나면 돌아가고, 낮은 지형으로 흘러 동굴을 형성한 용암계곡 일대는 인공 조림 없이 자연 그대로의 식생을 간직하고 있다. 협곡을 따라 형성된 숲이 넓은 도로처럼 산 아래에서 바다 방향으로 꿈틀대는 형상이다.
맞은편 전망대 아래는 용암이 분출한 거문오름 협곡이다. 그러나 높이가 좀 아쉽다. 바닥보다 115m 높은 낭떠러지지만 분화구의 범위가 넓어 한눈에 윤곽을 파악하기 어렵다. 맞은편 능선으로 규모를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거문오름의 진면목은 바로 분화구 안에 있다. 올라온 반대편 계단으로 내려가면 예상치 못한 넓은 초지가 나타난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다시 숲길로 들어서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숲이 나타난다.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곶자왈이다. 제주어로 ‘곶’은 숲, ‘자왈’은 자갈이나 돌덩어리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곶자왈은 돌무더기가 엉켜 있는 곳에 형성된 숲이다. 흙을 찾지 못한 나무뿌리가 돌덩이를 감싸고 있다. 그러자니 곧게 자라지 못하고 어지러이 가지를 뻗었다. 크고 작은 나무가 엉켜있는 숲은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돌덩이는 녹색 이끼에 덮여 있고, 덩굴식물은 나뭇가지를 타고 오른다. 원시의 기운이 가득한 환상의 숲이다. 제주에서도 특히 공기가 맑은 곳으로 학계에서 인정한 곳이다.
땅은 척박하지만 식생은 풍성하다는 게 또한 곶자왈의 특징이다. 김상수 해설사는 “거문오름은 독특한 지질 때문에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됐지만, 식물학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곳”이라고 했다. “한라산 1,000고지 이상의 골짜기에서 자라는 식물이 여기서 자랍니다. 전국의 양치식물의 80%가 제주에 있는데, 거문오름에서 거의 다 볼 수 있습니다. 탐방로만 돌아도 60종 이상을 볼 수 있으니 세계적으로도 드문 곳이죠.” 대표적인 것이 좀고사리다. 그것도 분화구 내부 특정한 지점, 특정 돌멩이 위에서만 자란다. 주걱비름은 산굼부리와 이곳에서만 발견되고, 쇠고사리는 오직 거문오름에만 있다. 양치식물만 많은 게 아니다. 탐방로를 걷다 보면 식나무·붓순나무·보리장나무 등 생소한 나무 이름 안내판을 발견하게 된다. 요즘에는 컴컴한 숲에서 보랏빛 은은한 탐라수국이 환하게 길을 밝힌다. 북방한계식물과 남방한계식물이 공존하는 곶자왈의 특성이다.
빌레호수(용암 암반에 형성된 호수)만 빼면 거문오름은 다른 오름의 특성을 모두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 이 깊은 골짜기로, 낭떠러지 용암동굴로 숨어든 제주 4ㆍ3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거문오름에서 분출한 용암은 월정리 해변까지 흐르며 10개의 용암동굴을 만들었다. 규모가 작은 2개를 제외하고 (위에서부터) 벵뒤굴 웃산전굴 북오름굴 대림굴 만장굴 김녕굴 용천굴 당처물동굴이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돼 있다. 만장굴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모든 동굴은 일반인의 접근이 막혀 있다. 그중 일부가 세계유산축전(10월 1~17일) 기간에 극소수의 인원에 한정 개방된다. 관광지로 홍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산섬 제주와 용암동굴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서다. 지난 8일 세계유산축전 사무국이 문화재청의 허가를 얻어 실시한 사전 언론 공개 행사에 동행했다. 입구에서 맛만 보고 온 격이지만, 거문오름용암동굴계의 감춰진 신비를 엿볼 수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에 던져진 짧은 시간이었지만 여운은 길었다.
거문오름에서 800m가량 떨어진 벵뒤굴은 초기 용암동굴의 형성 과정을 알 수 있는 곳이다. 벵뒤는 넓은 벌판을 의미하는 제주어다. 평지 낮은 지대를 흐르던 용암이 정체되거나 역류하면서 일대에 넓게 퍼지며 형성된 동굴이다. 거대한 터널 형태의 일반 동굴과 달리 총 길이 4.5㎞의 미로형 동굴이다. 지면과 가까워 23개 지점의 천장이 무너져 입구가 18곳이나 된다. 일부러 놓은 것같이 작은 돌다리 모양의 동굴 입구에서는 드라마 ‘킹덤' 시즌3를 촬영했다고 한다. 그만큼 음침하고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웃산전굴은 벵뒤굴보다 훨씬 규모가 큰 동굴의 상층부가 무너져 내린 구조다. 둥그렇게 절단된 상부 용암층을 기준으로 아래의 컴컴한 동굴과 그 위에 형성된 녹색 숲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웃산전’은 웃산에 있는 산밭이라는 뜻이다. 인근의 용암교 역시 비슷한 구조인데, 동굴 양쪽이 함몰돼 다리의 형태가 뚜렷하다. 협곡 경사면에는 수위에 따라 형성되는 물때 자국처럼 여러 겹의 절리층이 보인다. 여러 차례 용암이 흐른 증거다. 이곳 용암계곡은 최근까지 주민들이 갖다 버린 온갖 쓰레기로 몸살을 앓았다고 한다. 너무 흔해서 가치를 몰라봤던 경우다.
만장굴은 약 7.4㎞ 길이에 부분적으로 다층 구조를 지니는 용암동굴이다. 주 통로 폭이 18m, 높이가 23m에 이르는 큰 규모다. 현재 1㎞ 구간을 탐방할 수 있는데, 세계유산축전 기간에 미개방 구간을 소수 인원에 개방한다. 이 구간의 가장 큰 특징은 용암이 흐르다 정체되고 돌아가면서 굳은 다양한 밧줄 형태의 용암이다. 더러는 꽈배기 같고, 더러는 지표면으로 드러난 나무뿌리처럼 보인다. 인간의 솜씨로는 도저히 흉내 내기 어려운, 외계인이 작성한 것 같은 난해한 문양도 수두룩하다. 깜깜해서 무한한 상상력의 나래를 펴는 공간이다.
705m 길이의 김녕굴은 모양이 꾸불꾸불하고 뱀과 관련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어 김녕사굴 혹은 사굴로도 불린다. 다른 동굴과 달리 입구에 고운 모래가 덮여 있다. 조개껍질과 산호가루로 된 모래로, 해안에서부터 날아온 탄산염 퇴적물이다. 거문오름용암동굴계에서 가장 신비롭고 아름답다는 용천동굴과 당처물동굴은 훼손 위험 때문에 축전 기간에도 개방하지 않는다.
거문오름에서 흐른 용암이 바다와 만나기 전, 월정리에서는 제주 주민들의 지혜가 담긴 밭담의 전형을 볼 수 있다. 대지를 덮은 용암을 캐내 밭과 밭 사이 경계를 짓고, 바람을 막아주는 땀의 산물이다. 일정하지 않은 모양 때문에 빈틈이 많아 허술해 보이지만, 이 바람구멍이 강풍을 견디는 힘이다. 가지런하지 않은 비정형의 정형이 생활 속의 작품이다. 제주 밭담은 세계농업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밭담 사이로 산책로가 조성돼 있어 제주만의 독특한 농촌마을 정취를 즐길 수 있다.
월정리 해변은 뜨거운 용암이 바다를 만나 생명을 다한 지점이다. 급격하게 식은 용암이 더러는 커다란 빵 덩어리처럼 부풀었고, 더러는 거북 등껍질처럼 갈라졌다. 유난히 새까만 용암이 곱고 새하얀 모래, 투명한 에메랄드 바다와 환상적인 조화를 빚는다.
거문오름용암동굴계 미개방 구간 탐방 기회는 소수에게만 주어진다. 두 차례 2박 3일간 진행하는 ‘만장굴 전 구간 탐험대’는 각각 6명만 모집한다. 13일부터 20일까지 세계유산축전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을 받는다. 선착순이 아니다. 장시간 폐쇄된 동굴에서 견딜 수 있는 체력을 갖춘 19세 이상이 기본 조건이다. 이들 중 전문가 심사를 통해 제주세계자연유산의 가치를 공유하고 확산하고자 하는 목적에 부합하는 인물을 뽑는다. 5일간 하루 30명(회당 6명)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벵뒤굴 특별탐험대’와 ‘불의 길’로 명명한 거문오름에서 월정리까지 트레킹(6일간 하루 60명) 참가자는 8월 12일부터 모집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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