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3색 트로이전쟁 이야기

입력
2021.07.30 04:30

편집자주

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 월간 공연전산망 편집장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1인극 '일리아드'는 출연 배우마다 호흡을 맞추는 악기가 다르다. 김종구는 하프, 최재웅은 퍼커션, 황석정은 일렉기타가 일인극 무대를 동행하는 동반자가 되어 준다. 더웨이브 제공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는 트로이전쟁의 마지막 49일을 기록한 '일리아스'를 썼다. 그로부터 3,000년이 지난 2021년 수많은 신과 영웅들이 등장하는 대서사시는 1인극이 되어 대학로 무대에 올랐다. (연극 '일리아드'의 초연은 2010년 미국 시애틀 레퍼토리씨어터에서 이뤄졌다.)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일부를 대신하고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오늘날, 신들의 자존심 대결에서 비롯된 전쟁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뭘까.

연극은 그리스의 전쟁 영웅 아킬레스와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9년간 지속된 전쟁에서 그리스군을 이끄는 아가멤논은 아킬레스의 아끼는 노예를 빼앗으며 굴욕을 준다. 분노한 아킬레스가 더 이상 전투에 나서지 않자 전세는 트로이로 기울어진다. 아킬레스의 친구이자 연인인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스의 갑옷을 입고 참전해 전세를 역전시키지만 이내 들키게 되고 헥토르에게 목숨을 잃는다. 분노한 아킬레스는 헥토르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그의 시체를 끌고 그리스군 진영으로 돌아온다. 헥토르의 아버지인 늙은 프리아모스 왕이 아킬레스에게 무릎을 꿇고 간청해 아들의 시체를 돌려받는다.

연극 '일리아드'는 서양의 고전 '일리아스' 이야기를 한 명의 내레이터가 들려주는 형식이다. 내레이터는 트로이 전쟁의 수많은 영웅과 신의 이야기를 맛깔나게 들려주거나 행동으로 재현한다. 고대 음유시인들이 목이 긴 현악기인 사즈(Saz)를 연주하며 영웅들의 이야기를 읊조린 것처럼 '일리아드'의 내레이터는 연기와 화술을 총동원하여 관객들을 트로이 전쟁 한복판으로 안내한다.

'일리아드'에서도 음악은 배우의 100분간의 외로운 사투에 유일한 우군이 되어 준다. 마치 판소리의 고수처럼 내레이터가 트로이 전쟁을 들려주는 동안 악사는 무대 한켠에서 음악(음향)으로 상황을 떠올리게 돕는다. 내레이터에는 세 명의 배우가 캐스팅되었는데, 최재웅이 내레이터로 등장할 때는 퍼커션이, 황석정은 일렉기타가, 김종구는 하프가 이야기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악기로 동원된다. 악기를 단순 연주하는 것을 넘어 두드리고 현을 뜯고 다양한 방식으로 음악(음향)을 만들어 드라마틱한 상황을 상상하게 만든다.

배우마다 도움받는 악기가 다르듯 내레이터의 정체성도 다르다. 최재웅이 홈리스로 등장해 시니컬하게 이야기를 전달한다면, 김종구는 아주 오래된 전쟁 박물관의 큐레이터가 되어 좀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에 접근한다. 반면 황석정은 타로 점술사가 되어 미래가 궁금한 관객들에게 과거의 전쟁 이야기를 들려준다. 배우마다 작품에 접근하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다를 뿐만 아니라 도움을 주는 악기도 달라 배우마다 색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세 배우가 접근하는 방식은 달라도 전하는 메시지는 같다. 연극 '일리아드'가 지금 공연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작품은 3,000년 전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종종 현실을 환기한다. 끝을 모를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의 이야기에서 마트의 긴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빠지고,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에서 수천 년간 되풀이됐고 지금도 진행 중은 전쟁과 그로 인한 힘없는 희생자들을 상기시킨다. 아직 얼마 살지 못한 아이들, 꿈을 펼쳐보지 못한 청년들, 가족을 두고 온 병사들, 작품은 끊임없이 전쟁 때문에 희생된 평범한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무대에는 빈 투구 더미 위에 그리스 신전을 상징하는 듯한 기둥이 세워져 있다. 신들의 시샘과 경쟁으로 전쟁을 일삼던 신화적 시대에서 역사적 시대로 넘어온 이후에도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이유로 전쟁이 벌어지고 그 이유에 비해 너무나 가혹한 희생이 이어져 왔다. 신전 기둥을 받치고 있는 빈 투구들은 수많은 전쟁에 희생된 병사들, 아이들을 상징한다.

내레이터는 트로이 전쟁 이후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알렉산드로스 전쟁, 프랑스 혁명, 스페인 내전, 걸프 전쟁 등을 나열한다. 그 대사의 마지막에 미얀마 사태를 언급한다. 수천 년간 무모한 전쟁으로 희생된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 왜 이런 어리석은 전쟁은 되풀이 되는지, 작품은 관객에게 질문하며 막을 내린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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