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로 역사를 지킨 거인

입력
2021.07.29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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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9 간송 전형필

자기의 영묘함에 취한 듯 바라보는 간송 전형필. 한국일보 자료사진

자기의 영묘함에 취한 듯 바라보는 간송 전형필. 한국일보 자료사진

간송 전형필(1906.7.29~1962.1.26)이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부모와 양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은 부모를 만나 역사와 윤리와 정의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고, 오세창 같은 훌륭한 스승을 만난 덕도 컸다. 축재의 유혹은 으레 지닌 것이 많을수록 커지기도 하는 법이지만, 그는 부의 관성에 맞서 옳고 그름, 귀함과 천함, 아름다움과 추함을 판단하는 식견을, 또 실천하는 의지를 지닐 수 있었다. 그건 인간 전형필의 처절한 노력 덕이었다.

한성(서울) 종로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휘문고보와 일본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한 그는 막대한 상속 재산을 저 고집스런 싸움의 밑천으로 썼다. 그는 1900년대 본격화한 일본 고미술상의 조선 진출과 총독부 권력자들의 도자기와 서화 등의 매입, 반출에 맞서 그들의 기를 죽일 만한 배포와 재력으로 국보급 문화재들을 경매 등을 통해 사들이기 시작했다. 이충렬이 지은 전기 '간송 전형필'(김영사)에는 그의 여러 일화들이 소개돼 있는데, 그가 훗날 국보 제68호로 지정된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 구입 과정에서 일본 미술상의 기를 꺾고, 종당에 서로 찬사와 덕담까지 나누었다는 일화는, 총을 든 열사의 의거 못지않은 장쾌하고도 우아한 투쟁의 한 장면이었다.

그의 스승 오세창은 추사의 제자 오경석의 아들이다. 그는 청년 전형필에게 역사와 문화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데 기여했다. 전형필은 오세창의 빼어난 제자들을 비롯 최순우 등 문화사학계의 값진 인재들과 함께 미의 식견을 돋웠고, 그 안목으로 청자와 백자 등 수많은 유물과 겸재 정선, 신윤복의 그림들을 지켜 오늘의 간송미술관이 된 한국 최초 근대 사립미술관인 보화각을 채웠다. 또 그들과 함께 한국전쟁 난리통에 목숨 건 용기와 기지로 그것들을 지켰고, 전후의 자금난에도 끝내 수장품은 팔지 않았다.

그가 남긴 유물들은 지금도 그의 후손들이 연구자들과 더불어 관리하며 시민들에게 가끔 내보이고 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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