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혁명의 희생자들

입력
2021.07.12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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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2 카미유 데물랭과 바스티유 습격

파리 시민들에게 총을 들라고 선동하는 카미유 데물랭. 19세기 화가 펠릭스 조제프 바리아스의 그림. 위키피디아

파리 시민들에게 총을 들라고 선동하는 카미유 데물랭. 19세기 화가 펠릭스 조제프 바리아스의 그림. 위키피디아

프랑스 대혁명은 인류 역사에 크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사건 자체는 끔찍한 비극이었다. 자코뱅파 혁명 주역 다수는 분열과 숙청으로, 또 온건 지롱드파의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단두대에서 생을 마쳤고, 혁명 공화정부의 공안 공포정치 5년 동안 시민 50여 만 명이 숨졌다. 왕과 왕비의 처형으로 각인된 이미지와 달리 희생자의 80% 이상은 '반동 귀족'이 아닌 평민이었다. 혁명의 서막인, 1789년 7월 12일 바스티유 습격의 주동자였던 혁명파 저널리스트 카미유 데물랭(Camille Desmoulins, 1760~1794)도 친구인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단두형을 받았다.

세금으로는 왕실과 국가를 지탱하지 못할 지경에 몰린 루이 16세는 삼부회를 소집했다. 제1계급인 성직자, 2계급 귀족, 국민의 96%인 3계급 평민 대표들이 모여 토의할 의제는 1, 2계급에 부과할 세금의 세율과 과세 방법이었다. 하지만 계급적 대립으로 삼부회는 파행했고, 평민들은 별도 '국민의회'를 결성, 스스로 '제헌의회'라 선언하며 헌법 제정에 착수했다. 루이 16세는 통제력을 상실했고, 권력을 장악한 강경 귀족들은 제헌의회를 해산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했다. 평민편에 서서 귀족 과세를 추진하던 당시 재무장관 네케르의 파면(7월 11일)이 혁명 도화선에 불을 당겼다.

삼부회 평민 대표 중 한 명이던 데물랭은 12일 팔레 루이얄 광장의 군중을 향해 열정적인 어조로 "총을 들어야 할 때"라고 외쳤다. 그는 연대와 식별의 표식으로 광장의 가로수와 같은 희망의 색인 녹색 리본으로 팔을 묶자고 제안했다. 변호사가 꿈이었으나 심한 말더듬이 증상 때문에 기자가 됐다는 그였다. 그의 더듬는 어조는 억눌린 분노와 흥분처럼 오히려 선동적이었다. 시민들은 당일 보훈병원으로 몰려가 무장했고, 이틀 뒤 바스티유를 허물었다.

그는 자코뱅 강경파의 공포정치에 맞서다, 동지이자 아이들의 대부인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관용파 대부인 조르주 당통과 함께 처형됐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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