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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위선과 교육의 한계를 경계한 박애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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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둘 사타르 에디(Abdul Sattar Edhi, 1928.2.28~2016.7.8)는 종교와 민족, 이념을 초월해 빈민과 병자를 보살핀 파키스탄 박애주의자다.
그는 고교를 중퇴하고 옷가게 점원으로 일하던 19세 무렵, 카라치(Karachi) 인근에 무료 진료소를 열고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11세 때부터 간병해온 전신마비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직후였다. 의술을 못 익혔으니 사실 병자들의 무료 쉼터인 셈이었지만, 그는 병자들을 어머니처럼 돌봤다. '2파이사(paisa, 1/100루피)가 있으면 1파이사는 다른 이와 나눠야 한다'던 어머니의 가르침을 실천한 거였다. 그에겐 어머니가 종교였다.
인도와 전쟁을 치르던 때였고, 복지에 관한 한 사실상 '국가 부재' 상황이었다. 해외 자선단체들이 그를 후원했다. 에디는 1951년 '에디 재단'을 설립, 노숙자 쉼터와 고아원, 가출 청소년 보호·교육시설, 여성 보호시설 등을 잇달아 설립하며 봉사 영역을 확대했다. 그의 진료소는 전문 의료진이 운영하는 정식 병원으로 진화했고, 지금은 1,500여 대의 앰뷸런스로 파키스탄 전역의 응급 환자를 이송하는 네트워크를 운영 중이다. 그가 구한 이는 고아 5만여 명을 비롯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들은 에디를 '파더 테레사(Father Theresa)'라 불렀다.
간호사 출신 아내(Bilquis)와 2남2녀를 두고 평생 재단을 운영하면서도 그는 월급 없이 정부 빈민 보조금으로 생활했다. 카슈미르 분쟁 등 종교·이념을 불문하고 병자와 부상자, 가난한 이들을 돕는 그를 극우 무슬림 종교단체는 흘겨보았다. 2014년 원리주의 단체 소속원으로 보이는 무장 강도가 재단 사무실을 털어가기도 했다.
그는 '마더 테레사'와 달리, 종교의 위선을 경계했다. 출세를 위한 기능주의적 교육도 못마땅해 했다. 그는 "사람(people)이 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곧장 사람(human)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지금은 아들(Faisal Edhi)이 재단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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