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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라이팅, 그리고 가해자의 비겁한 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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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은 한국 문학의 최전선입니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나오기 전까지 널리 읽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일보는 '이 단편소설 아시나요?(이단아)' 코너를 통해 흥미로운 단편소설을 소개해드립니다.
가스라이팅(gaslighting).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대방의 행동과 심리를 교묘하게 조종해 심리적으로 착취하거나 정서적으로 학대하는 것을 일컫는다. 주로 가족이나 연인처럼 가까운 사이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눈치채기 쉽지 않다. 그러나 가스라이팅은 엄연히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하는 폭력의 일종이다.
릿터 30호에 실린 정소현의 단편소설 ‘단 한 번의 일’에 등장하는 연인 현우와 진아 역시 가스라이팅이 지배하는 관계다. 한때 잘나갔다가 지금은 잊힌 뮤지션 현우는 스물네 살 어린 연인 진아를 향해 “너는 바닥을 보이게 만드는 사람”이라든가 “화를 돋우는 사람”이라고 폭언을 일삼는다. 그러나 진아는 현우로부터 도망칠 수가 없다. 현우가 깨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달 전 새벽, 현우의 차는 고속도로 중앙분리대와 충돌했다. 수술만 열두 시간이 걸렸고 중환자실에서 2주를 보냈다. 일반병실로 옮긴 뒤에도 현우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깨어난다 해도 뇌 손상이 심해 장애를 얻게 될 것이라고 했다.
진아는 자책한다. “그날 제가 선생님과 다투지 않고 함께 있었더라면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같이 있어 달라는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제 탓”이라고 생각한다. 사고 발생 전날 현우가 진아에게 남긴 스물 세 통의 부재중 전화와 열 통의 문자메시지 때문이다. 현우는 문자로 “떠나지 말라고, 당장 돌아오라고” “돌아오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진아는 알고 있다. “그날 밤 전화를 받고, 문자를 확인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다시 집으로 돌아가 그와 함께” 있었더라면 “지금 침상에 누워 있을 사람은 자기 자신일 거라”는 걸. 스스로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기 전날, 현우는 진아의 목을 조르고, 뺨을 때리고, 바닥에 밀쳐 넘어뜨리고, 발로 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아는 “자신이 맞을 짓을 한 거였고, 현우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리고 다짐한다. “그가 깨어난다 해도 예전처럼 돌아가지 못할 수 있지만 헌신하리라”고. 진아는 명백한 가스라이팅과 데이트폭력 피해자였지만, 현우가 교통사고를 당함(혹은 냄)으로써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는 뒤집어진다.
소설은 현실의 극히 일부다. 28일 한 20대 남성이 자신의 자택 인근 화단에서 자살했다. 그는 5일 전 인천지하철 2호선 주안역 내 에스컬레이터에서 앞에 서 있던 여성의 등에 소변을 본 혐의로 경찰조사를 받던 중이었다. 사건은 피의자가 사망함에 따라 공소건 없음으로 종결된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백한 경계가 가해자의 비겁한 도망으로 흐릿해지는 이런 일들을, 우리는 정말이지 지긋지긋할 정도로 자주 봐왔다.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정세랑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 중) 살아남은 ‘피해자’가 그 어떤 죄책감도 갖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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