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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자백만 500명… 사후에도 착취당한 ‘엽기 살인’의 희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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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 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한국일보>
1947년 1월 15일 수요일 아침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로스앤젤레스(LA). 세 살배기 딸과 함께 레이머트 공원을 산책하던 베티 버싱어의 눈에 끔찍한 장면이 들어왔다. 허리 부분이 완전히 잘린 한 여성의 상·하반신이 잔디밭 위에 놓여 있었던 것.
훼손된 시신은 말 그대로 ‘엽기적’이었다. 온몸엔 피가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고, 장기는 모두 제거된 채 주변에 따로 모여 있었다. 얼굴은 입술이 양쪽 귀까지 찢긴 이른바 ‘글래스고 스마일’ 형태였다. 얼굴과 가슴 등 곳곳엔 심한 자상도 있었다. “처음엔 버려진 마네킹인 줄 알았다”는 진술이 나왔을 정도다. 인근에선 피가 담긴 시멘트 자루까지 발견됐다.
희생자는 할리우드 인근에 거주하는 22세 여성 엘리자베스 쇼트. 사망 직전 웨이트리스로 일했고, 배우의 꿈을 품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관련 공부를 하거나 이력을 쌓진 않았다고 가족과 주변인들은 진술했다.
부검을 집도한 프레드릭 뉴바 LA카운티 검시관은 쇼트의 사인이 입을 찢으며 발생한 과다출혈 및 얼굴과 머리에 가해진 충격이라고 봤다. 사망 시간은 시신 발견 10시간쯤 전으로 추정됐다. 용의자가 쇼트를 살해한 뒤 시신을 절단, 깨끗이 씻은 다음 공원에 버렸다는 게 부검의의 판단이었다.
도대체 누가, 어떤 이유로, 꿈을 제대로 펴 보지도 못한 젊은 여성을 이토록 잔인하게 살해한 것일까. 초동 수사에만 로스앤젤레스경찰(LAPD) 등에서 수사관 750명이 투입됐으나, 사건은 파면 팔수록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대도시 공원 인근에서 벌어진 일이건만, 목격자는커녕 자그마한 단서조차 나오지 않았다. 시신 발견 6일 전(1947년 1월 9일)부터는 행적도 뚜렷하진 않았다. 성범죄 가능성을 열어 두고 검사했지만 정액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 시신 발견 장소에서 약 3㎞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쇼트의 가방과 신발 등은 이미 휘발유로 깨끗이 닦여 지문마저 찾을 수 없었다.
미국 역사에 손꼽힐 만큼 잔인함과 미스터리로 가득한 이 사건은 ‘원자폭탄 투하 이후 최고의 이슈’가 됐다. 순식간에 2만5,000건의 제보가 쏟아졌고, 3,000명이 수사선상에 올랐다. 시신이 너무 ‘정교하게’ 잘린 탓에 인근 서던캘리포니아대 의대 학생들까지도 조사 대상에 이름을 올렸다. 해부 기술 없이는 불가능한 데다, 수법이 1930년대 ‘하반신 절단술’로 불렸던 수술 기법과 비슷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경찰은 학생들에게선 어떤 단서나 증거도 찾지 못했다.
일단 경찰은 150명을 유력 용의자로 보고 심문에 나섰다. 시신이 놓인 지점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살던 외과의사 월터 베일리, 쇼트에게 추파를 던졌다 거절당한 지역 유지 마크 한센, 사건 발생 며칠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쇼트와 술을 마셨던 육군 하사, 생전 쇼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자 실종 직전 함께 여행을 갔던 것으로 알려진 로버트 맨리, 시신 발견 당일 새벽 공원 근처에 차량을 주차했던 남성 등이었다. 초동 수사 당시 ‘내가 범인’이라고 허위 자백을 한 사람도 무려 60명에 달했다. 당시로선 잘 쓰이지 않던 거짓말탐지기까지 동원됐다.
그러나 모두 허사였다. 상당수는 알리바이가 있었고, 나머지도 뚜렷한 범죄 혐의점이나 증거를 찾긴 힘들었다. 시의원이던 로이드 데이비스가 용의자에 대한 핵심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에겐 1만 달러(현재 물가로 약 11만6,000달러·1억3,000만 원)를 지급하겠다며 현상금까지 내걸었지만, 결정적 단서는 얻지 못했다. 오히려 범인을 사칭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부작용만 나타났다.
결국엔 미 연방수사국(FBI)까지 투입됐으나 수사는 진척을 보이지 않았다. 사건 발생 한 달 뒤 지역 일간 LA 데일리뉴스는 “더 이상 새로운 단서가 없어 수사가 ‘막다른 벽’에 다다랐다”고 보도했다. 수사에 매달렸던 피니스 브라운 경사 역시 “아무 결론도 얻지 못하고 있다. 무언가 찾으면 곧바로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버린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건의 본질은 희미해졌다. 남는 건 자극뿐이었다. 유명해지고 싶어 범인이라 자백한 사람도 500명으로 늘었다. 그중엔 사건 발생 시점인 1947년에 태어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은퇴할 때까지 이 사건에 매달린 LA의 유명 형사 존 P. 세인트존 경사는 훗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살인 관련자라고 나서는 게 놀라울 지경”이라고 했다.
반세기가 지난 2000년대에도 여진은 이어졌다. LAPD에서 23년간 강력범죄를 파헤친 형사이자, 범죄스릴러 분야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티브 호델은 자신의 부친 조지 호델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나섰다. 조지 호델과 관련해 그는 △사후 확인된 개인소유물에서 쇼트의 사진이 발견된 점 △의학 관련 학위를 가진 점 △과거 수사관들이 자택을 감청했을 당시 “내가 블랙 달리아(쇼트를 의미)를 죽였다고 생각해도 된다”고 언급했던 점 등을 증거로 제시했다. 하지만 진실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
언론은 숨진 쇼트를 더 처참하게 짓밟은 ‘제2의 가해자’였다. ‘엽기적 범죄’와 ‘아름다운 여성 희생자’의 조합은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당시 지역 일간지 등 신문 매체의 1면엔 한 달 넘도록 이 사건이 등장했다. 언론은 쇼트에 대해 “고문받다 숨졌다” “매춘부였다” “성(性) 불감증이었다” 등과 같이 무책임하고 근거 없는 말을 쏟아내는 주변인들 진술을 경쟁적으로, 선정적으로 보도했다.
일간 ‘LA 이그재미너’의 경우, 사건 초기 피해자의 어머니에게 연락해 “딸이 미인대회에서 수상했다”는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해당 매체는 쇼트의 사생활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얻고 난 뒤에야 딸의 사망 소식을 알렸다. 일부 기자들은 유족을 다른 기자들로부터 떼어내고 기사를 독점하려는 욕심에 “LA로 올 경우 항공편과 숙박료를 모두 대 주겠다”는 제안도 했다.
용의자로 추정되는 사람 역시 언론을 창구로 이용했다. 사건 발생 일주일 후부터 몇몇 지역 언론사엔 신문 활자를 오려낸 편지들이 속속 도착했다. 여기엔 “1월 29일 오전 10시까지 자수하겠다” “마음이 바뀌었다. 날 찾지 말라”는 등의 문구가 담겼다. 이들 매체는 편지 내용을 그대로 대서특필했다. 진위 문제는 따져 보지도 않았다.
‘엘리자베스 쇼트’라는 본명보다 더 유명한 ‘블랙 달리아’라는 명칭 역시 사후 언론이 만들어냈다. 쇼트는 생전 이런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으나, 언론은 그가 검은 옷을 즐겨 입었고, ‘블루 달리아’라는 영화를 좋아했다는 소문을 인용해 이같이 명명했다. 언론의 행태는 사건 수사에도 혼선을 주면서 여론의 지탄을 샀다. 수사기관 관계자들이 “기자들이 검증 없는 보도를 남발하면서 수사를 오염시킨다”고 혀를 찼을 정도다. 아이러니하게도 쇼트의 죽음은 언론계가 사건 보도 원칙과 취재 윤리 문제를 고민하게 한 계기가 됐다.
74년이 흐른 지금, 진실의 퍼즐을 맞출 조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영원한 미제로 남을 공산도 크다. FBI는 미제 사건을 소개하는 페이지에서 “여전히 살인자를 찾지 못했고 시간도 소요된 점을 감안할 때, 범인은 결코 발견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블랙 달리아’ 사건은 제임스 엘로이의 동명 소설(1987년)과 영화(2006년)를 비롯, 수많은 예술 작품의 직간접적 모티프가 되기도 했다. 잔인한 폭력에 희생된 쇼트는 사후에도 선정적 방식으로 착취를 당한 데 이어, 이제는 소설 속에서, 영화 속에서 ‘타락한 도시의 희생자’로 또다시 소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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