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의 탈나치화와 한국의 반민특위

입력
2021.06.01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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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노덕술'이라는 추한 상징

일제 악질 고문경찰 노덕술. 그의 존재는 한국 초대정부 한계의 상징이다. 위키피디아

일제 악질 고문경찰 노덕술. 그의 존재는 한국 초대정부 한계의 상징이다. 위키피디아

1945년 7월 연합국 수뇌부는 독일 포츠담에 모여 전후 독일 재건을 위한 '4D원칙'에 합의했다. 무장해제(Demilitarization)·민주화(Democratization)·탈중앙집중(Decentralization)·탈나치화(Denazification)였다. 하지만 냉전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1948~1949년 베를린 봉쇄, 1952년 스탈린의 국경선 획정(오데르-나이세 선)….이 원칙은 밀쳐졌다.

양 진영이 이견 없이 합의한 '탈나치화'도 예외가 아니었다. 정치 경제 사회 법률 문화 언론 교육 등 거의 모든 공공영역에 스민 나치 이데올로기와 인력 배제 및 재교육은 조속한 국가 재건 과제와 충돌했고, 나치와 반공 이념을 공유한 서독 진영이 '탈나치화'에 더 소홀했다.

두 진영은 질서, 부흥으로 민심을 수습하며 자신들의 이념을 확장해야 했다. 핵심 전범이 아닌, 나치 동조자의 범위와 불이익 수위를 정하는 일도 사실 난제였다. 전후 연합국은 약 40만 명의 '탈나치화' 대상자를 구금했지만, 영국은 1946년 1월, 미국은 두 달 뒤 자신들의 '몫'을 독일 측에 넘겼다.

서독의 탈나치화가 공식 종료된 것은 1951년 연방의회의 '나치 피해자 보상법' 입법이었다. 하지만 초대 총리 아데나워는 1949년부터 사실상 탈나치화에서 손을 뗐다. 그는 수백만 명의 나치 동조자를 정상적 삶에서 배제할 경우 극단적 민족주의의 불씨가 되살아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현실주의자였던 그에게는 경제 등 국가 재건이 더 급했다. 그가 국민을 설득할 수 있었던 건, 그 자신이 나치 탄압으로 두 차례나 투옥된 피해자였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견결한 의회민주주의자였다.

해방 후 이승만 정부가 일제 악질 고문 경찰 노덕술(1899.6.1~1968.4.1)을 중용하고, 그를 징죄하려던 반민특위를 오히려 탄압, 해산한 것도 표면적으론 아데나워의 노선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승만이 중시한 것은 국가가 아닌 자신의 권력이었고, 이 과정을 의회민주주의를 짓밟으며 수행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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