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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統 미사일을 우주로 쏘아 올린 문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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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한국일보>
근 반세기 만에 미사일 주권 회복을 위한 마지막 퍼즐이 맞춰졌다. 국산 미사일 사거리와 탄두 중량을 제한한 ‘한미 미사일 지침’이 완전 폐기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21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기쁜 마음으로 미사일 지침 종료 사실을 전한다”고 밝혔다.
1979년 박정희 유신 정권 당시 미국은 우리나라 탄도미사일 사거리와 탄두 중량을 각각 180㎞와 1,000파운드로 규제하는 족쇄를 채웠다. 인권과 평화를 글로벌 이슈로 내세운 지미 카터 미 행정부가 동북아 군비 증강과 정세 불안을 원치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자주권을 훼손하는 부당한 지침이었지만 42년 전 한국의 상황을 돌이켜보면 피눈물 나는 스토리가 담겨 있다. ‘강제성 없는 양해각서에 불과하다’는 자주파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언감생심 미국의 지침을 무시하고 자주국방 가속 페달을 밟을 배짱은 없었다.
유신 정권은 1974년 5월 군 전력증강 ‘율곡 사업’ 일환으로 비밀리에 미사일 국산화를 추진했다. 최소 10년이 걸린다는 미사일 개발을 국내 연구진은 불과 4년 만인 78년 9월, 사거리 200㎞에 달하는 국산 1호 백곰 미사일을 성공리에 쏘아 올렸다. 군 통수권자의 결연한 의지와 물불 가리지 않는 연구진의 헌신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뜻밖에 미국과 유엔사령부가 발목을 잡았다. 80년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국방과학연구소 내 미사일 관련 부서를 통째로 없애는 구조조정으로 미국의 요구에 더욱 몸을 낮췄다. 반전은 83년 북한의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였다. 장관급 각료를 포함해 17명을 한꺼번에 잃는 대참사를 겪은 전두환 정권은 해고한 미사일 인력을 다시 불러들였다. 이후 총 4차례 지침 개정을 통해 사거리는 800㎞로 늘어났고, 탄두중량 제한은 풀렸지만 여전히 미국 간섭에 시달려야 했다. 그 사이 북한은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로 미 본토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쯤에서 이런 의문을 던져야 한다. 한국 미사일 개발에 미국이 제동을 건 진짜 속내는 무엇일까. 모범 답안은 자국 무기 판매를 위해서다. 동맹의 가치보다 국익 우선을 몸소 증명한 미국이다.
미국은 1882년 조선이 서구열강과 통상조약을 맺은 1호 국가다. 조약 전문 14개 조항 중 제1조에는 “타국의 불공평이나 경멸하는 일이 있을 때에 확인하고 도와주며, 잘 조처하여 두터운 우의를 보여준다”라고 명시돼 있다(고종실록 19권, 고종19년 4월 6일 신유 3번째기사). 그러나 미국은 1905년 카스라-태프트 밀약으로 한국을 배신하고,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를 사실상 용인했다. 이후 45년 점령군으로 한반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뒤, 한국전쟁으로 전시작전권까지 넘겨 받았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한국에 한미동맹은 혈맹으로 굳어졌고 신성불가침 반열에 올랐다. 배신과 충성이 교차한 수교 139년이다.
그런 점에서 유사시 거의 무제한으로 적을 타격할 수 있는 미사일 주권회복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일부에서 미국의 대중국 견제 ‘이이제이’ 카드라며 의미를 깎아 내리고, 북ㆍ중ㆍ러의 반발만 불러일으켜 불필요하다는 넋 나간 분석도 있다. 하지만 자강을 너머, 우주 탐사 개발 신시장 창출이라는 큰 틀에서 보수 야당의 긍정적인 평가도 눈에 띈다.
남은 과제는 조속한 전작권 반환이다. 평시작전권을 환수한 이후 30년 가까운 해묵은 숙제다. 이런저런 전제조건이 혹처럼 붙어 있지만 우리 내부의 사대주의가 가장 큰 걸림돌이다. 백곰 미사일을 ‘무늬만 국산’이라며 조롱하고 폄하한 세력들이 오버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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