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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을 준비가 된 독자를 위한 여행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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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은 한국 문학의 최전선입니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 나오기 전까지 널리 읽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일보는 '이 단편소설 아시나요?(이.단.아)' 코너를 통해 흥미로운 단편소설을 소개해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해외는 2020년 1월 늦은 겨울휴가로 다녀온 포르투갈이다. 불과 몇 주도 지나지 않아 코로나 팬데믹이 전세계를 덮쳤고, 비행기는 멈췄고, 사람들은 발이 묶였고, 여행자들은 갈 곳을 잃었다.
이런 때, 방구석의 우리를 단숨에 외국의 어느 도시 한가운데로 이동시켜 주는 데 소설만한 게 없다. 악스트 36호에 실린 정지돈 작가의 단편소설 ‘지금은 영웅이 행동할 시간이다’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전세계의 공항과 기차역, 터미널, 카페, 술집과 거리, 삶이 봉쇄되고 멸균되기 전” “사람들이 진보적 낙관주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을 때”의 파리와 런던을 여행하는 두 여행자의 이야기다. 단, 정지돈이라는 이름에서 짐작한 독자도 있겠지만 이 이야기는 결코 어느 유명한 관광지에 대한 낭만적 주석이 아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여행자는 두 명이다. 런던을 여행 중인 나, 파리를 여행 중인 엠이다. 둘은 화상 통화를 하며 각자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겪은 일에 대해 공유한다.
엠은 파리에서 공산당원 간호사와 국제 서커스 그룹에서 목마를 타는 노동자를 만나 코뮤니즘 페스티벌에 함께 간다. 그곳에서 불문학 전공자로 10년 전 파리에 왔지만 석사만 수료한 채 한국으로 돌아갈 타이밍을 놓친 유학생 엔씨를 만난다. 20세기 초 활동했던 초현실주의 시인의 작품을 번역 중인 엔씨는 거리의 노숙자 생활 끝에 파리의 지하 공동묘지 카타콤에 자리를 잡는다. 엠은 엔씨를 따라 그곳에서 이틀간 머물며 잃어버린 자전거를 찾는다.
그런가 하면, 나는 밤늦은 시각 런던 숙소 인근 KFC에서 치킨 세트를 먹다가 팔뚝이 내 몸통만 한 백인 남성으로부터 위협을 당한다. ‘웨얼 아유 프롬?’이라 묻고 ‘노스? 사우스?’라고 되물은 그는 “남의 나라 와서 떠들어도 되냐고?” 나를 겁박한다. 가까스로 KFC를 빠져나온 나는 숙소에 돌아와 조지 오웰이 영국의 국민성과 정치 성향에 대해 쓴 에세이를 펼쳐 읽는다. “애국심만큼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잘 먹히는 발명품은 없다”
황홀한 여행일수록 감상을 하나로 정의하기 어렵듯 이 소설의 줄거리 역시 명쾌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정지돈의 소설은 그 안에서 길을 잃을 준비가 되어 있는 독자에게 더욱 친절한 여행지다. 독자는 그저 소설 안에서 ‘파리의 휘광에 이끌려 온 유학생, 이민자, 떠돌이’ 그리고 인종차별주의자와 스치고, 런던의 거리와 파리의 지하무덤을 헤매고, 신자유주의와 코뮤니즘에 대해 짧게 사색할 뿐이다.
최근 코로나 백신 접종이 가속화되며 국내 여행사들은 팬데믹 종식 이후 사용할 수 있는 해외여행 상품을 판매하고 나섰다. 요새 나는 세계 여러 도시의 드라이브 풍경을 보여주고 현지 라디오를 함께 들려주는 Drive&Listen이라는 사이트에서 시간을 자주 보낸다. 컴퓨터 모니터에서 이국의 낯선 풍경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언젠가 팬데믹이 종결되고 모니터 속 거리에서 진짜 헤매게 될 날을 고대하며, 오늘은 대신 이 소설 안에서 하염없이 헤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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