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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찬란한 혁명가의 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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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국부(國父) 호찌민(1890.5.19~1969.9.2)을 객관화하긴 힘들다. 베트남전쟁의 성격을 어찌 규정하든, 그는 북베트남 국가주석이자 총사령관이었고 한국군은 그 전쟁에서 5,000여 명을 잃었다. 부상자도 1만1,232명. 16만 명의 고엽제 피해는 미국 전쟁범죄(화학무기는 제네바협약 위반이다) 탓이니 빼더라도 그렇다.
베트남인에게 그는 독립·건국의 영웅이자 혁명가다. 그는 프랑스 식민지 조국의 가난한 유학자의 아들로 태어나 현지인 관리 양성학교인 프랑스-베트남학교에 입학했다가 반프랑스 징세반대운동에 가담해 퇴학당했고, 유럽으로 건너가 사회주의 이론을 사실상 독학하며 프랑스 사회당, 공산당에 입당해 해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현지 다양한 매체에 베트남 식민지의 실상과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글을 기고했고, '프랑스식민지인민연맹'을 결성해 동포를 조직화하고 기관지를 편집, 발행했고, '베트남인민의 8개항 요구' 문건을 작성해 1919년 6월 베르사유회의장에 달려가기도 했다.
프랑스 정부의 감시와 박해를 피해 러시아로 중국으로 떠돌면서 그는 당대 사회주의 혁명 주역들과 교유했고, 기민한 외교감각으로 미국을 통해 프랑스를 견제하고 중국 국민당군에도 손을 내미는 유연성을 과시했다. 그가 영국령 홍콩에서 '베트남공산당(인도차이나공산당으로 개칭)'을 창당하고, 국내 활동가 조직화 및 저항운동을 본격화한 것은 41세 때인 1930년이었다. 피신과 은신 체포와 위장, 탈출은 일상이었고, 그는 200여 개의 가명을 썼다.
그의 전선은 레닌이나 마오쩌둥보다 광막했고, 발밑은 허술했다. 그 조건에서 그는 프랑스와 싸웠고, 일본과 싸웠고, 미국(과 한국)과 싸워 승리했다. 독립 후 권력 투쟁과 일련의 혁명 사업 중 자행한 국가폭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국의 이승만과는 비교할 수 없는 명예와 존경을 누리는 것은, 자유에 대한 이상과 혁명가로서의 역량 못지않게 검소하고 단정한 인품 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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