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 없는 전선'의 포로들

입력
2021.05.07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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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거제포로수용소장 인질극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의 수용소 재현 디오라마관. gmdc.co.kr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의 수용소 재현 디오라마관. gmdc.co.kr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2월 부산 동래와 수영 등지에 분산 수용돼 있던 인민군과 중공군 포로들이 신설 거제수용소로 이송됐다. 수많은 포로들을 낙동강 전선 인근에 두는 것이 불안해서였다. 유엔군은 1950년 11월부터 거제 고현동 인근 12㎢ 부지에 포로들을 동원, 수용동과 망루를 짓고 철조망을 둘렀다. 6월 말 이송 작업이 마무리될 무렵, 수용 인원은 17만3,000명(중공군 약 2만 명)에 달했다.
7월 10일 휴전회담이 시작됐고, 포로 송환은 회담의 주요 의제 중 하나이자,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난제였다. 북측은 '일괄 송환'을 요구했고, 유엔군 측은 '자유 송환', 즉 개인의 자유의사에 맡기는 방식을 고수했다. 포로 중에는 강제징집돼 어쩔 수 없이 인민군복을 입은 이도 있었고, 전선에서 이탈해 스스로 포로가 된 이도 있었다. 반공포로는 수용소의 소수였다.

유엔군의 수용소 통제력은 경비만으로도 허덕일 만큼 부실했고, 특히 밤의 수용소는 친공포로들의 해방구나 다름없었다. 인공기가 예사로 걸려 나부꼈고, 사상검증과 인민재판이 행해졌다. 처형도 잦았고, 방식도 중남미 마약범죄자들이 밀고자에게 행하는 것 못지않게 잔혹했다. 유엔군 측은 세력 균형을 맞춘답시고 '전투력 있는' 반공 포로들을 의도적으로 수용하기도 했다.

1952년 2월 친공포로 폭동으로 미군 한 명이 숨지고 38명이 부상하고, 포로 77명이 숨지고 140여 명이 부상하는 참사가 빚어졌다. 유화조치로 1952년 5월 7일 포로대표단과 대화에 나섰던 수용소장 프랜시스 도드 준장이 인질로 납치됐다가 3일 만에 풀려난 일도 있었다.

10년 뒤 김수영이 시에 썼듯이 '지도책 속에는 없는 전선'의 포로들은, 적어도 일부는 이념과 충동과 양심과 싸우며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기만해야 했다. 1953년 6월 석방된 '반공 포로'는 약 3만5,000명이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친공포로로 북으로 송환됐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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