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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이 아니라 내가 통째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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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은 한국 문학의 최전선입니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나오기 전까지 널리 읽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일보는 '이 단편소설 아시나요?(이단아)' 코너를 통해 매주 한 편씩, 흥미로운 단편소설을 소개해드립니다.
낯선 남자가 내 거실에서 태연히 신문을 읽고 있다. 누구냐고 묻자 사위라고 말한다. 어떤 날은 낯선 여자가 나를 아버지라 부르는데, 내가 알고 있는 딸의 얼굴과 전혀 다르다.
최근 개봉한 영화 ‘더 파더’는 이처럼 뒤틀린 기억에 갇힌 치매 노인의 내면을 그린다. 내 기억이 주변의 증언과 전혀 다를 때, 그리하여 내 기억 전체를 의심해야 할 때, 기억은 삶의 증명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미로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문장웹진 4월호에 실린 이광재 작가의 단편 ‘386번지’는 ‘더 파더’와 함께 보면 좋을 소설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른 무엇도 아닌 기억으로 쌓아 올려진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시키는 작품이다.
소설의 화자는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여자다. 엄마 생일에 맞춰 고향에 내려갔던 그날 이후, 나는 간단하게는 카톡 비밀번호에서부터 심지어는 누구와 친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화자는 “내가 사라졌다. 내 기억이 아니라 내가 통째 사라졌다”고 말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단서를 찾기 위해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노량진의 한 고시원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발견한 각종 흔적을 통해 내가 외교관 시험을 준비 중이었고, 매일 오후 도림천을 산책했으며, 잠들기 전에는 담배 한 대를 피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더불어 “나는 엄마의 자랑”이었지만, “엄마의 자랑이 허영으로 끝나지 않게 내게도 그것이 자부심이자 축복이었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메모도 발견한다. 내가 기억을 잃은 이유를 밝혀줄 첫 번째 퍼즐 조각이다.
두 번째 단서는 ‘수렵’이라는 남자에게 보낸 이메일이다. 그에게 보낸 이메일을 통해 내가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아이티에 있는 가발공장에서 일했지만, 그곳의 노동자를 대하는 한국인 관리자들의 태도를 견디기 힘들어 곧 그만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한때 그와 철학연구회에서 함께 활동하며 같은 미래를 그렸지만, 어느 순간 “우린 게으를 수도 없고 저 너머를 바라보지도 못할 곳에 버려진 셈이지. 난 떠날 거야”라는 작별 인사를 나눠야만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나는 마지막 퍼즐을 맞추기 위해 수렵에게 직접 만날 것을 제안하지만, 정작 약속 장소에서 수렵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나는 그곳에서 도망치고 만다.
소설의 핵심은 하나 둘 밝혀지는 기억보다도 이를 되짚어가는 과정 그 자체에 있다. 그리고 절박한 심정으로 그 자취를 쫒고 있는 사람의 정체가 마침내 드러날 때, 독자는 비로소 이 이상한 과정을 납득할 수 있게 된다. 질문에 답해줄 당사자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 오로지 흔적만이 유일한 답변일 때, 그걸 더듬는 게 모든 남겨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소설은 사실 기억을 잃은 사람이 이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상실과 애도에 관한 이야기다.
4월만큼은 모두가 같은 기억에 사로잡힌다. 공통의 상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기억에서만큼은 영영 자유롭고 싶지 않다. 끊임없이 더듬고 복기하고 싶다. 그게 상실의 자리를 메우는 유일한 길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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