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反푸틴 인사들 독살 시도… 범인은 없다?

입력
2021.04.23 05:3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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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러시아 푸틴 정권 암살 의혹

편집자주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 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5일 화상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모스크바=AP 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5일 화상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모스크바=AP 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84세가 되는 2036년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권좌를 지킬 수 있다. 지난해 헌법에 이어 올해 선거법까지 바꿔 합법적인 권력 기반도 모두 마련했다. 60%를 웃도는 지지율을 감안하면 당분간 대통령 자리를 내줄 위험은 없다. 러시아 최장기 지도자를 꿈꾸는 그에게 진짜 걸림돌은 없을까, 아니면 걸림돌을 이미 제거해 버린 걸까.

러시아 야권은 물론 서방국가들도 답은 후자라고 믿는다. 알렉산더 리트비넨코 전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요원, 친(親)서방 성향의 빅토르 유셴코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 가장 최근에는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까지. 푸틴을 맹렬히 비판한 뒤 죽임을 당하거나 암살 위협에 시달렸던 이들이다. 살인 무기로 활용된 독극물은 그저 그런 범죄집단이나 테러조직이 만들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여태 범인을 찾지 못한 것도 정부 차원의 조직적 배후가 존재한다는 의심을 뒷받침한다.

야권 지도자 쓰러트린 화학무기

지난해 독살 시도를 당한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가 2월 명예훼손 등 혐의로 재판에 참석해 웃고 있다. 모스크바=AP 연합뉴스

지난해 독살 시도를 당한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가 2월 명예훼손 등 혐의로 재판에 참석해 웃고 있다. 모스크바=AP 연합뉴스

요즘 푸틴에게 가장 눈엣가시는 나발니다. 그는 러시아 전역과 해외를 쏘다니며 푸틴 정권의 부패와 실정을 폭로해 왔다. 나발니는 지난해 8월 항공기 기내에서 독극물 증세로 쓰러졌다가 극적으로 살아났다. 당시 응급 치료를 맡았던 시베리아 옴스크병원 의료진은 독성 물질이 검출되지 않았다고 발표했으나 이후 치료를 맡은 독일 의료진은 화학무기 일종인 ‘노비촉’이 나발니를 쓰러트렸다고 봤다.

노비촉은 러시아 정부를 사건 배후로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 단서다. 냉전시대 끝무렵인 1980년대 옛 소련에서 개발된 노비촉은 지금도 러시아에서만 생산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엔 산하 화학무기금지기구(OPCW)가 화학무기로 공식 분류했을 만큼 독성이 강해 고도로 훈련받은 이들만 다룰 수 있다. 2017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형 김정남을 절명케 한 VX 신경작용제보다 독성이 5∼8배나 강하다.

노비촉은 앞서 2018년 영국에서 일어난 러시아 이중간첩 세르게이 스크리팔과 딸 율리야 독살 미수 사건에서도 등장했다. 러시아 군정보기관인 총정찰국(GRU) 장교 출신인 스크리팔은 2006년 러시아 정보기관 인물들의 신원을 영국 대외정보기관 MI6에 넘긴 혐의로 기소돼 13년형을 선고받았다가 2010년 미국과 러시아의 대규모 스파이 맞교환 때 풀려난 인물이다.

나발니가 직접 증거를 제시하기도 했다. 안보기관 고위 간부를 사칭해 FSB 요원에게서 자신을 공격한 방법을 알아낸 뒤 유튜브 채널을 통해 폭로한 것. 콘스탄틴 쿠드리야프체프란 이름의 요원은 노비촉을 나발니 속옷에다 사용했고 그가 응급치료를 받은 시베리아 옴스크로 날아가 옷을 압수해 흔적을 없앴다고 설명했다.

물론 현재로선 모두 ‘설(說)’에 불과하다. 러시아 정부는 어떤 독성 물질도 검출되지 않았다는 입장이고, 나발니 관련 조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미국과 독일 등 서방 국가들의 투명한 조사 요구에도 철저히 귀를 닫고 있다. 푸틴도 맘만 먹으면 나발니를 죽일 수 있다며 모든 의혹을 부인했다. 당사자가 제시한 인터뷰 증거 역시 미 정보기관의 협잡 정도로 치부했다.

사건의 진실이 미궁에 빠진 가운데 나발니는 생사 기로에 있다. 올해 1월 투병을 끝내고 귀국하자마자 사기 혐의로 교도소에 수감된 그는 연일 건강이 나빠져 사망 우려까지 나온다. 변호인단은 나발니 몸무게가 최근 하루 0.9㎏씩 줄어 수감 뒤 13㎏나 빠졌다고 전했다. 그런데도 나발니는 교도소 내 열악한 병동 시설로 옮겨진 것 외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간접 살인’이란 국제사회의 비난이 쏟아지는 이유다.

푸틴 방사능 홍차부터 다이옥신까지

2006년 암살 당한 것으로 알려진 러시아 전 정보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사망 직전 촬영된 사진을 봐도 병색이 완연하다. 로이터 연합뉴스

2006년 암살 당한 것으로 알려진 러시아 전 정보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사망 직전 촬영된 사진을 봐도 병색이 완연하다. 로이터 연합뉴스

나발니 전까지는 일명 ‘방사능 홍차’가 푸틴 정권의 대표적 암살 의혹 사건이었다. FSB 요원으로 일하다가 영국으로 망명해 반(反)푸틴 활동을 했던 알렉산더 리트비넨코가 피해자다. 그는 2006년 11월 FSB 요원들을 런던 밀레니엄호텔에서 만나 차를 마신 후 심한 복부 통증을 느끼고 병원에 입원했지만 3주 만에 숨졌다. 사망 직전 그의 소변에서 검출된 방사성물질인 ‘폴로늄 210’이 사인으로 지목됐다. 같은 물질이 찻잔에서도 발견되면서 의심의 눈초리는 자연스레 푸틴 정권으로 향했다. 이 때부터 ‘푸틴이 방사능 홍차를 보냈다’는 식의 말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사건 발생 10년 만인 2016년 영국 당국은 당시 리트비넨코를 만난 FSB 요원들이 그를 독살했고 푸틴 대통령이 연루됐을 수 있다는 진상조사 보고서를 내놨다. 하지만 벌써 러시아로 돌아간 요원들을 돌려 받을 길은 없었고, 단죄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러시아 정부는 줄곧 배후를 부인하고 있다.

러시아 국민만 암살 위협에 노출된 게 아니다. 러시아의 반대를 무릅쓰고 2004년 재선에 도전했던 빅토르 유셴코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비극의 주인공이다. 러시아는 소련 연방에 속했던 우크라이나를 서방에 밀착시키는 유셴코가 못마땅했다. 그러던 중 재선을 두 달 반 앞둔 2004년 9월 유셴코 전 대통령이 얼굴 피부가 크게 손상된 모습으로 대중 앞에 섰다. 전 우크라이나 보안국장 등과 식사를 하고 갑자기 질병을 앓고 나서였다. 당시 그를 치료한 스위스 병원은 다이옥신 중독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는데, 문제가 된 식사의 쌀에서 독성 물질이 검출됐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유센코는 2007년 서방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서 다이옥신이 러시아에서 제조됐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당국은 당연히 “사실무근”이라고 일축했다. 2018년에도 유셴코는 영국 BBC방송 인터뷰에서 푸틴이 자신을 해한 배후에 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물증도 있다고 항변했으나 처벌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많은 의문사, 해결 가능할까

2004년 빅토르 유셴코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다이옥신 추정 화학물질 공격을 받기 전후 모습. 다이옥신에 중독돼 얼굴 전체에 흉터가 남았다. AP 연합뉴스

2004년 빅토르 유셴코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다이옥신 추정 화학물질 공격을 받기 전후 모습. 다이옥신에 중독돼 얼굴 전체에 흉터가 남았다. AP 연합뉴스

유명인의 암살 의혹은 빙산의 일각일 뿐, 러시아 안팎에서 일어난 필부필부의 의문사 사건은 훨씬 많다. 조사 자체를 하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고, 사건을 들여다 봐도 실체가 규명되거나 처벌로 이어진 사례는 거의 없다. 국제사회가 힘을 합쳐 전방위 대응을 하지 않은 이상 진실을 밝히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다.

말 잔치와 미약한 제재로 러시아 정부를 움직일 수 없다는 명제는 이미 입증됐다. 2018년 영국이 스크리팔 독살 시도 사건 조사 끝에 28개국의 동의를 얻어 이례적으로 153명의 러시아 외교관들을 추방했지만, 실질적 타격은 없었다. 유셴코는 당시 “유럽 나라들끼리 사이가 좋지 않아 러시아에 대응하는 데 이 정도밖에 연대하지 못한다”며 더 강력한 조치를 촉구하기도 했다. 나발니 사건도 비슷한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다.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는 “나발니의 목숨을 구하려면 매우 강력한 행동이 필요하다”면서 “푸틴 차명 자산까지 죄다 동결해야 그를 감옥에서 꺼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진달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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