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그런 게 아니고

입력
2021.03.30 04:30
수정
2021.03.30 13:0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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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수 '미조의 시대'

편집자주

단편소설은 한국 문학의 최전선입니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나오기 전까지 널리 읽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일보는 '이 단편소설 아시나요?(이단아)' 코너를 통해 매주 한 편씩, 흥미로운 단편소설을 소개해드립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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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다닐 때 ‘예술의 말과 생각’이라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저명한 인문학자인 교수님이 도스토예프스키와 샤갈, 베토벤과 타르코프스키에 대해 들려주는 인기 교양 강좌였다.

늘 그랬듯 그때도 최악의 취업난으로 대학생들은 구직에 여념이 없었다. 교수님은 첫 수업에서 예술에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스펙 쌓기에만 열중인 요즘 대학생들에 대해 통탄했다. 그 순간 강의실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나와 내 친구들이 전시 대신 토익 점수에, 공연 대신 알바에 몰두하는 게 예술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걸 교수님이 몰라준다고 생각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엉엉 울었다. 예술을 하기에 충분한 시간과 돈이 없다는 깨달음에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악스트 35호에 실린 이서수의 ‘미조의 시대’를 읽으며 나는 그때 그 비참했던 버스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주인공 미조와 그 주변인들이 처한 상황은 아무래도 예술과는 거리가 멀다. 아픈 엄마와 단 둘이 사는 미조는 여러 회사에서 경리로 일했지만 현재는 마땅한 일이 없는 상태다. 살고 있는 전셋집에서는 곧 쫓겨나게 생겼는데 보증금 5,000만원으로 서울에서 구할 수 있는 집이라곤 반지하뿐이다.

중증 우울증 환자인 미조의 엄마가 종일 집에서 하는 일이라곤 시를 쓰는 게 전부다. 지인인 수영 언니는 웹툰 작가가 꿈이었지만 지금은 여성을 감금하는 내용의 성인 웹툰 회사에서 어시스턴트로 일한다. 오빠인 충조는 10년 동안 공시생으로 살다가 지금은 단기 아르바이트로 연명하고 있다.

이서수 소설가 ⓒ김서해

이서수 소설가 ⓒ김서해

영 보잘것없고 나아질 기미도 딱히 보이지 않는 이들의 삶에도, 예술은 깃들어 있다. 엄마는 귀가한 미조에게 매일 “떡집에서 못 팔고 버린 떡 같은 하루”라고 쓴 자신의 시를 읽어준다. 수영 언니는 자신이 “그림을 잘 그리는 게 너무 걱정”이고, 충조는 지방을 돌아다니며 밤이면 빛으로 번쩍거리는 공단을 넋을 놓고 바라본다.

무엇보다 미조는 “나가서 폐지를 줍는 게 낫지”라며 자책하는 엄마에게 “잘 쓰잖아” 하고 격려한다. 엄마가 시인이, 수영 언니가 작가가, 충조가 관객이, 미조가 후원자가 아닐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예술이 ‘그런 것’만은 아니고, 예술은 ‘이런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0년 전 뛰쳐나오고 싶었던 그 수업은 꾹 참고 들은 끝에 A+를 받았다. 기말고사를 치르고 나서야 교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예술이 ‘그런 것’만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땐 괜한 열등감 탓에 많은 어른들을 오해했다. 그 수업 덕에 주변 예술에 눈 밝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도 생각한다.

그때 그 교수님의 심정으로, 이 소설 ‘미조의 시대’, 그리고 얼마 전 사망한 여성 인디 뮤지션 도마의 노래를 널리 알리고 싶다. 어디에 있건 당신들의 예술이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기다리는 독자와 관객이 여기에 있으니.

“나지막한 네 목소리도 부드러운 손길/또 고운 눈길도 없지만/웃음 짓는 얼굴, 웃음 짓는 그 얼굴도 없지만/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앉아 있는 일/그냥 여기서 널 기다리는 일”(김도마 ‘너 가고 난 뒤’)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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