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가 신문사에 불을 지른 까닭은

입력
2021.03.23 04:3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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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잠수종과 독'

편집자주

단편소설은 한국 문학의 최전선입니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 나오기 전까지 널리 읽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일보는 '이 단편소설 아시나요?(이단아)' 코너를 통해 매주 한 편씩, 흥미로운 단편소설을 소개해드립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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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의 메일함에는 온갖 사람들의 사연이 쌓인다. 억울한 사람들, 화난 사람들, 슬픈 사람들, 아픈 사람들이 저마다의 절박함으로 기자에게 메일을 보낸다. 물론 그 중 기자가 속 시원하게 답할 수 있는 메일은 드물다. 애초에 언론은 중계만 할 뿐 해결책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온갖 사건에 참견하고 첨언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무관해지는 것이 언론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타인의 삶을 재료 삼는 일은 어떤 식으로든 그 삶과 유관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유관함은 때로 우리를 같은 불길로 집어삼킨다. 릿터 28호에 실린 이장욱의 단편소설 ‘잠수종과 독’에서 기자와 사진작가가 방화사건의 피해자가 된 까닭일 것이다.

사건이 벌어진 곳은 한 진보 성향 신문사 4층에 위치한 편집국이었다. 60대 중반의 남성 A씨가 저지른 불로 세 명이 사망하고 열일곱 명이 부상을 당한다. 희생자 중에는 젊은 인턴 기자와 퇴임을 앞둔 편집국장도 포함됐다. 방화범은 자신의 몸에도 불을 붙인 뒤 4층에서 뛰어내렸고 이 모든 장면을 녹화해 SNS에 중계했다.

유력 언론사를 상대로 한 전대미문의 방화사건. 방화 동기를 찾기 위해 온갖 추측이 동원된다. 이 신문사는 과거 A씨의 절도를 장발장에 비유한 기사를 게재한 적이 있었다. A씨가 보수 성향 신문사의 칼럼을 모아둔 이력도 재조명된다. A의 종교적 관심이, 정치적 성향이, 범죄 이력이 심판대로 불려 나왔다. 그러나 그 중 정확히 어느 것이 그가 이 신문사에 불을 지른 이유인지는 알 수 없다. 이유에 답할 당사자인 A씨가 전신의 신경계가 훼손된 채로 병실에 누워 있기 때문이다.

이장욱 소설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장욱 소설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제 사건의 진실을 밝힐 유일한 열쇠는 A씨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주치의 공에게 넘겨진다. 그러나 공 역시 이 방화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공의 연인인 현우도 이 방화 사건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프리랜서 사진작가였던 현우는 언론사 건물에 불이 붙던 순간 인근을 지나고 있었다. 현우와 불은 얼마든지 무관한 일로 끝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우는 분쟁 지역을 촬영하는 사진가였고, 그런 현우에게 이 불은 결코 무관한 불이 아니었다.

방화범은 현우를 죽이기 위해 불을 지르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현우는 그 불로 인해 죽었다. 이제 공은 그 불을 지른 남자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 그 아득한 유관함 앞에서 공은 생전에 현우가 남긴 말을 떠올린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일들에도 실은 우리의 의지와 선택이 들어가 있다고. 우리의 의지와 선택도 실은 세상의 논리가 작용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아주 사소한 선택이 의외의 결과를 만드는 데도 실은 온 세상이 개입하는 것이라고.”

오늘도 기자들의 메일함에는 온갖 사람들의 온갖 사연이 쌓인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기사로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 사연에 개입하는 순간, 속수무책으로, 지독하게 얽혀 들고 말 것이다. 영원히 무관해질 수 없을 것이다. 불빛 주위를 빙빙 돌다가 불 속으로 들어가 타 죽는 저 부나비처럼.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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