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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조사에 휘둘리는 정치의 비극

입력
2021.03.17 00:00
27면
청와대 전경. 한국일보 자료사진

청와대 전경. 한국일보 자료사진


현직 대통령과 차기 대통령 후보 지지율이 거의 매일 조사 발표되고 그 수치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정치는 마뜩하지가 않다. 그런 여론조사가 지배하는 민주주의는 권력정치를 키운다. 최고 통치자가 언제 힘을 잃을지 그 자리를 누가 차지할지를 두고 다투는 정치에서 남는 것은 권력투쟁뿐이다. 당연히 제3정당처럼 다른 가치를 지향하는 세력들이 설 자리는 없어진다. 강자들 사이의 사활적 권력투쟁 속에서 약자들의 여린 목소리가 들릴 리도 없다.

정치의 문제가 몇 퍼센트짜리 지지율 후보인가로 단순화되면, 그래서 모두가 지지율 숫자를 높이기 위해 연신 국민 여러분을 외쳐대는 정치가 되면, 민주주의는 신흥 종교와 유사해진다. 미래 권력에 자신을 의탁하려는 인간의 나약한 심리만 조장되기 때문이다. 양산되는 것은 아첨 정치가요, 보기 힘든 것은 신념의 힘과 용기를 가진 정치가다.

혹자는 여론조사야말로 민심의 향방을 보여준다며, 과학적인 방법과 절차를 준수한다면 국민의 의사를 효과적으로 나타낸다고 응수할지 모르겠다. 정치가들이나 정당이 그런 민심에 따르면 될 일 아니냐며 핀잔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론조사는 정치의 도움이 필요한 시민들의 절박한 요구나 그들의 피와 땀, 수고와 눈물을 담아내지 않는다. 정치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책임성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말해주는 바도 없다. 같은 목적의 조사도 시점에 따라, 질문에 따라, 응답 목록에 따라 달라지는 게 여론조사다. 질문이 복잡해도 안 된다. 평가적 질문이나 윤리적 내용을 가질수록 오류 가능성은 말할 수 없이 커진다. 오죽했으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정치학자 조반니 사르토리가 여론조사 결과를 가리켜 "주권에 대한 가엾은 묘사"라 했을까.

민심은 정치와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정치를 통해 형성되고 변화되는 게 민심이다. 시민은 동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열정을 가진 다원적 집단들로 이루어져 있는 바, 그들의 이익과 열정을 조직한 다양한 결사체들은 물론 정견을 달리하는 복수의 정당들이 멋지게 경합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그 장점을 잃는다. 조사되는 민심은 시민을 수동적인 피조사자나 구경꾼으로 만들 뿐 그 속에서 능동적인 변화의 가능성은 만들어질 수 없다.

일상의 생활세계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활동가들과 그들의 조직이 움직여야 하고, 그 과정에서 신뢰를 얻은 정치가들이 성장하고 좌절하고 후회하고 다시 노력할 수 있어야 정치다. 시민들도 다양한 결사체의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 회비·당비·조합비도 내고, 논의와 결정 과정에서 목소리도 내야 한다. 그 속에서 실망도 하고 변화도 모색해보고 다른 사람의 체온과 땀 냄새를 느끼며 협력하는 것을 시민참여라 하지, 조사에 응하고 SNS에 의견 올리고 국민청원에 찬성 클릭을 보태는 것을 참여라 할 수는 없다. 책임을 나누고 공유할 수 없는 참여는 공허하다 못해 허망하다.

최고 권력을 두고 매일 국민투표 하듯 여론조사가 반복되는 정치에서 남는 것은 목소리 큰 소수의 지배다. 대통령을 만들 수 있는 영향권 안에서만 정치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이 행복한 것도 아니다. 지지율이 떨어지면 감옥행이나 탄핵 같은 어두운 사망의 골짜기를 헤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끝은 결국 비극이다. 이런 정치, 언제까지 계속할까.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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