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열 걸음도 못 걷는 내 몸이 증거인데... 가습기 살균제가 무죄라니"

입력
2021.01.21 16:09
수정
2021.01.21 16:15
구독

피해자총연합, 21일 법원 앞 규탄 회견

가습기살균제참사피해자총연합이 21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법원의 1심 무죄 판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로 사망한 고 박명숙씨의 남편 김태종(가운데)씨가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있는 모습. 이승엽 기자

가습기살균제참사피해자총연합이 21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법원의 1심 무죄 판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로 사망한 고 박명숙씨의 남편 김태종(가운데)씨가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있는 모습. 이승엽 기자


투병생활 13년. 16번째 중환자실로 들어갈 때, 당신은 마지막을 예측이나 한 듯 "고맙다"고 말했죠. 그 모습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여보, 사랑하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고(故) 박영숙씨의 남편 김태종씨의 편지

"젊을 때 '날쌘돌이'였는데, 지금은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헐떡거립니다. 우리 몸이 증거인데... 가해자들이 무죄라니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21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만난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자 서강훈(66)씨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서씨는 분노와 억울함에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 없어 부산에서 새벽 첫 차를 타고 왔다고 했다. 그는 "고통 받는 사람들이 이렇게 존재하는데, 피해자들의 말을 묵살하고 방관만 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습기살균제 관련 회사 임직원들이 1심 재판에서 전원 무죄를 선고받자,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과 유족들이 기업들에 사실상 '면죄부'를 준 법원을 규탄하고 나섰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자총연합은 이날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의 독성을 기업들이 알고 있었음이 확인됐지만 법원은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없다'는 판결을 내놓았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판결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고 억울하고,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피해자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과, 살아있지만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이들의 몸이 명백한 증거"라며 "가해 기업들은 죗값을 치르고 정부도 관리 감독을 제대로 하지 못한 부분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앞서 이달 1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부장 유영근)는 업무상 과실치사 등 혐의로 기소된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 등 관계자 13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현재로선 CMIT·MIT 성분은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과 달리 인과관계가 확인 내지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유해물질과 피해 현상간의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가족이 21일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시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가족이 21일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시스

기자회견에는 부산과 전북 등 전국 각지에 모인 20여명의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참석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장소를 여러 곳으로 나눠 행사가 진행됐다. 피해자들이 자체적으로 대규모 기자회견을 기획해 목소리를 낸 것은 이날이 처음이다.

2018년 아내 이정자씨를 먼저 다른 세상으로 떠나보낸 송기진씨는 아내의 사진을 품에 안은 채 "무죄 판결 소식을 들었을 때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며 "재판부가 전문가의 연구 결과와 증언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피해자 손수연씨도 "판결문에서 언급된 11명의 피해자 중 9명이 영유아였고, 그중 2명이 사망했다"며 "가습기살균제가 아니라면 태어나자마자 아팠던 아이들의 원인은 무엇인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해 8월 숨진 박영숙씨의 남편 김태종씨가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하는 순서가 오자, 참석자 대부분이 흐느끼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씨는 "당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재판에서 피고인들이 모두 무죄가 나왔다오. 너무 황당해 1,197명의 사용자들이 모두 울분과 분노에 흥분했어요. 당신에게 너무 미안합니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산소발생기를 달고 현장에 온 조순미 피해자연합 대표는 "11년 동안 투병하며 3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며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모두가 힘을 모아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

검찰은 1심 무죄 판결을 수긍하지 못해 항소 방침을 정한 상태다.

이승엽 기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