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터지니 또 나오는 'OOO법'... 전문가들 "차분한 논의부터"

입력
2021.01.0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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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장에서 김병욱(가운데), 황보승희 등 야당 의원들이 '16개월 정인이법(아동학대 방지 관련 4법)' 발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오대근 기자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장에서 김병욱(가운데), 황보승희 등 야당 의원들이 '16개월 정인이법(아동학대 방지 관련 4법)' 발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오대근 기자


민식이법, 김용균법, 윤창호법에 이어 이번엔 '정인이법'이다. 양부모 학대로 생후 16개월 만에 숨진 '정인이 사건'에 대한 사회적 공분이 커지자 국회가 부랴부랴 '정인이법'을 통과시킬 움직임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못마땅하다는 분위기다. 아동 학대 관련 법안 수십여 건을 뭉개고 있다 이제사 '뒷북 대응'에 나선 것인 데다, 예산이나 인력 확충 등 근본적인 해법은 등한시한 채 처벌 강화만 외치고 있어서다. 사안이 뜨거울 때 내놓는 '여론 무마용 입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현장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차분한 대응이 실효성 있는 대책을 낳는다고 입을 모은다.

'정인이법' 쏟아내는 여야 ... 전문가 "이게 왜 '정인이법'인가"

7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법안심사 제1소위원회를 열고 친권자 징계권을 삭제해 체벌을 금지하는 민법 개정안과 아동학대가 신고되면 즉각적인 조사·수사 착수를 의무화하는 아동학대범죄 처벌 특례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두 법안은 8일 오전 법사위 전체회의를 거쳐 오후 본회의에서 처리될 예정이다.

그러나 전문가들 반응은 싸늘하다. 민법 개정안은 지난해 6월 충남 천안에서 여행용 트렁크에 감금됐다가 숨진 9세 아이 이야기가 전해진 뒤 법무부가 내놓은 대책이었고, 아동학대 신고 시 대응 조치에 대한 방안 역시 지난해 11월 보건복지부와 경찰청이 '정인이 사건' 재발 방지책으로 발표한 내용을 뒤늦게 보완한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법안 모두 수개월 전에 법사위 법안소위에 올랐으나 정쟁에 밀려 논의조차 되지 않다 '정인이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벼락치기 심사'가 이뤄졌다.

내용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은 고개를 갸웃한다. 김영주 변호사(전 법무부 여성아동인권과장)는 "정인이가 숨진 작년 10월에는 조용하다가 갑자기 대책이 쏟아지고 있지만, 현장에선 기존 제도도 활용이 안 되고 있고, 분리조치 등의 방안은 이미 있었다"며 "제도 개선을 하려면 진상 조사부터 제대로 해 차분하게 원인을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법정형 높인다? "무죄 가능성 높여 피해자가 더 힘들 수도"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이 쏟아지는 것에 대해선 더 큰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국회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현재 발의된 아동학대범죄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은 40여개에 달한다. 특히 ‘정인이 사건’ 방송 이후 접수된 16건의 법안 중 5건은 아동학대범에 대한 형량을 높이는 내용이다.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아동학대치사에 대한 처벌을 현행 5년에서 10년 이상으로올리는 내용의 '아동학대 무관용 처벌법'을 대표발의했고, 양금희 국민의힘 의원도 아동학대 재범의 경우 가중처벌 규정을 신설하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여야는 이날 충분히 논의되지 못한 다른 '정인이법'들에 대해 2월 임시국회에서 다시 논의할 예정이다.

서혜진 한국여성변호사협회 인권이사는 "무슨 사건이 터지면 법정형이나 처벌 형량 강화를 얘기하지만 범죄 예방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전담 공무원들의 개입 권한을 높이고 숙련된 인력 확보를 위해 예산을 늘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도 전날 페이스북을 통해 "처벌 강화에는 동의하지만 법정형만 높일 경우, 입증 책임 또한 커져 검찰에서 기소가 잘 안 되거나 법원에서 무죄가 나올 가능성이 높아진다"며 "피해자들이 더 힘들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졸속 입법 부르는 '네이밍 법안' 자제해야" 지적도

사람 이름을 딴 '네이밍 법안'이 갈수록 늘어나는 현상에 대한 비판도 제기된다. 여론에 휩쓸려 충분한 논의 없이 법이 제정되거나, 정치인들이 인지도 제고를 위해 법안 발의 자체를 남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9년 12월 국회를 통과한 민식이법(‘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에서 차량에 부딪혀 사망한 김민식군 사고를 계기로 제정된 이 법안은 과잉 처벌 논란을 낳기도 했다.

여론의 관심이 식으면 흐지부지되거나 핵심이 빠진 '반쪽 입법'이 되는 경우도 많다.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가 운송설비 점검 중 사고로 숨진 뒤 등장한 '김용균법'도 그렇다. 1년간 논의 끝에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 즉 김용균법이 지난해 4월부터 시행됐으나 정작 김씨의 업무는 도급금지 대상에 포함되지 않아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이란 비판을 받았다. 가수 구하라씨의 죽음 이후 양육의무를 저버린 부모가 상속할 수 없도록 하는 이른바 ‘구하라법’(민법 개정안)도 논의가 됐지만, 지난 20대 국회 임기만료와 함께 폐기됐다.

김윤철 경희대 후미니타스칼리지 교수는 "네이밍 법안의 경우 사회적 관심을 높이고 변화를 만들어내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지만, 갈수록 상업적인 목적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며 "특히 피해자 이름을 붙일 경우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환구 기자
박진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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