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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낙태를 벌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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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던 1990년대 후반, 친구는 임신 사실을 알린 이후 남자친구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발을 동동 굴렀다. 친구의 부탁으로 들어선 낡은 수술실은 유난히 추워 온 몸이 덜덜 떨렸다. 김신애 목사(감리교여성지도력개발원)에게 '낙태'는 이처럼 서늘한 기억이다. 의지할 곳 하나 없던 그 날의 냉기를 아직도 기억하는 김 목사는 "종교의 이름으로 성경을 들이대며 낙태죄 폐지를 반대하는 건 교회의 수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아이를 낳든 낳지 않든 임신 자체만으로 삶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교회가 나서 여성을 핍박할 순 없다"라고 강조했다.
혼자만의 주장은 아니다. 김 목사와 김하나 섬돌향린교회 전도사, 대한성공회 노승훈·자캐오(민김종훈) 신부, 개신교 신자인 '믿는 페미' 활동가 달밤 등이 함께하는 '성과 재생산 크리스천 포럼(성과재생산포럼)'은 신앙의 언어로 낙태죄 없는 세상을 그리는 유별난 이들이다.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낙태죄 폐지가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에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만난 성과재생산포럼 회원들은 통념과 달리 한국 교회에 임신 중단을 죄악시하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과대 대표되고 있어요. 기독교에서 주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보수 성향을 지닌 남성 어른이죠. 그러나 실제로 교회를 이루고 있는 건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여성들도 많고요. 과연 그들이 삶 속에서 낙태를 반드시 반대할까요." (달밤 활동가)
"사실 교인들은 그동안 낙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거나 생각할 여지조차 없었습니다. 공론화 과정은 당연히 없었고요.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는 반대해야 할 것 같은데, 교회 밖으로 나가면 나 자신, 혹은 주위의 일이니 무조건 반대한다고 말할 수 없는 양가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김하나 전도사)
기독교에서 말하는 '낙태는 태아의 생명권을 빼앗는 죄'라는 주장이 성서에서 비롯됐다는 인식 역시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고 전했다. 오늘날 임신중단(낙태) 반대의 근거로 주로 읽히는 성서 구절은 '생육하고 번성하라'(창세기1:28)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국가가 산아제한 정책을 펼 때는 적게 낳아 잘 키우며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을 번성이라고 가르쳤고, 출산이 장려될 시기에는 많이 낳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 전달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낙태에 관해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아요. 그렇기에 성서가 일관되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비춰 이 문제를 봐야 하는 거죠. 성서는 '과부와 고아,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른바 정상 가정에서 벗어난 존재를 처벌하는데 강력하게 반대하는 거죠. 그런데 왜 임신 중단을 하게 된 여성들만 교회에서 내쫓겨야 하나요." (김신애 목사)
"종교 규범으로서의 성서와 사회의 법에 대한 논의는 다른 층위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성서를 인용한다면 안에 담긴 정신을 이야기해야죠. 억울한 자를 억울하지 않게 하옵시고, 묶인 자를 풀어주시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애써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가는 게 진리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정신을 따르는 게 중요하지 성서의 구절을 현행법에 적용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노승훈 신부)
성과재생산포럼은 정부가 임신 주 수와 사유에 따라 낙태죄를 존치하는 입법 예고안을 내놓은 올해 10월 청와대 앞에서 이를 전면 폐지하라는 기자회견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기독교 안에서 임신 중단은 입에 담는 것조차 터부시되는 일이다. 아예 존재를 지워버리는 일도 흔하다. "현장에서 청년들과 관련 토론을 시도했는데 안 했으면 좋겠다는 반응이 나왔습니다. 우리 중에 '그런' 사람은 없는데 왜 이 얘기를 해야 하느냐, 입에 담기도 싫다는 저항감이 느껴졌어요." (노승훈 신부)
"낙태를 설명하는 기독교적 언어가 우리에게 전혀 없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정책이나 법으로서의 임신 중단은 배우거나 말할 수 있는 게 많은데 교회의 언어로는 낙태에 대해서 이야기해본 적도 없는 거죠. 여성들의 경험, 맞닥뜨리는 삶에 대해서는 교회가 말하지 않아 왔다고 깨닫게 됐죠." (김신애 목사)
그러나 말하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월경이 늦어지면 혹시 계획하지 않았던 임신일까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여성의 '사소한' 경험은 그 상대자인 남성에게까지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자캐오 신부는 '아비 없는 자식'으로 평생을 살아온 자신의 경험을 털어놨다. 그의 어머니 역시도 임신중단을 고민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젊은 나이에 이혼한 어머니가 결국 저를 낳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 이후에 겪게 된 일들···. 저는 어머니의 꿈과 수많은 것들을 밟고 일어서서 살아가던 부분들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어머니께 '만약 저를 낳지 못하고 낙태하셨어도 다른 식으로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을 거다, 그게 기독교 신앙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씀드렸죠." (자캐오 신부)
"처녀가 애를 가져서 낙태를 한다는 프레임이 있지만 실제로는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사는 여성들이 하는 경우도 많아요. 그런 여성들도 그냥 교회 다 다니고 있거든요. 여러 상황이 있을 수 있는데 여성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기 어렵게 처음부터 임신 중단에 대해서는 죄책감부터 느끼게하는 분위기가 있죠." (달밤 활동가)
헌재의 결정으로 새해부터 낙태죄는 자동 폐지된다. 국회는 올해 안에 대체 입법에 나설 계획이 없다. 임신 중단이 더 이상 범죄가 아니라고 해서 그 새로운 세계가 유토피아는 아니다. 입법 공백 속에서 낙태는 죄가 아니게 됐지만,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지원정책 또한 공백 상태이기 때문이다.
"여성도 생명이잖아요. 저도 과거 20대에 친구를 위해 임신중단이 가능한 병원을 찾아본 적이 있는데 마치 쥐가 궁지에 몰린 느낌이었거든요. 그런 상황으로 종교가 여성들을 몰아가고 있는 것은 생명 존중이라고 할 수 없죠." (김하나 전도사)
"이미 태어난 생명에 대해 책임질 의지가 없는 정부나 사회가 생명을 존중한다면서 여성과 태아를 대립 구도에 놓는 것은 전혀 종교적이지 않습니다. 종교는 과학이나 의학적 사실과 더불어 세상을 유기적으로 이해하려는 관점을 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성이 임신 중단을 생각할 때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그들이 더 안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자캐오 신부)
"사실 지금쯤이면 임신 중단 시술에 보험 적용 여부를 의논해도 늦은 시점이죠. 낙태죄 폐지 이후는 이미 우리가 살고 있었어야 하는 세상을 되찾아 오는 의미라고 생각해요. 한국 여성들의 당연한 권리와 정보 접근권을 보장하고 또 이 권리를 다시 잃어버리지 않게끔 만들어 두는 게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김신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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