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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콜드케이스] 흉기로 돌변한 진통제… 치사량 1만배 독극물 누가 넣었나

입력
2020.05.15 05:00
수정
2020.05.15 08:25
15면

<5> 타이레놀 독극물 연쇄 살인

7명 잇단 의문사, 접점은 타이레놀… 시신에서 ‘시안화물’ 검출

“100만달러 안 주면 추가 범행” 협박범 잡았지만 알리바이 확실

제조사 존슨 앤 존슨, 손해 감수하고 3300만통 회수

이후 관련 법 개정ㆍ약품 포장 강화 조치 등 계기로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1982년 독극물 살인 발생 당시 시중에 유통된 타이레놀 포장 용기와 캡슐. 요즘처럼 병 뚜껑을 2중 포장으로 감싸거나 용기 내부 입구를 은박지로 밀봉하는 등의 보호장치가 없어 변조가 쉬웠다. AP 자료사진
1982년 독극물 살인 발생 당시 시중에 유통된 타이레놀 포장 용기와 캡슐. 요즘처럼 병 뚜껑을 2중 포장으로 감싸거나 용기 내부 입구를 은박지로 밀봉하는 등의 보호장치가 없어 변조가 쉬웠다. AP 자료사진

플라스틱 약품 통을 개봉하며 애를 먹은 경험이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뚜껑에 둘린 띠를 제거하다 손톱이 깨지기도 하고, 누른 뒤 돌려야 하는 안전마개가 구비된 약통 역시 열기가 꽤 까다롭다. 약 한 번 먹는데 이렇게 공을 들여야 하나 의문이 들 법도 하지만, 38년 전 미국 일리노이주(州) 시카고 일대에서 일어난 사건을 들여다 보면 이런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며칠 새 지근거리에 사는 7명이 같은 약을 먹고 숨졌다. 누가 봐도 제약사의 과실이 예상되는 집단 의료사고였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문제의 약을 만든 제약업체는 사고 발생 후 더욱 승승장구한다. 여태껏 범인이 잡히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1982년 10월 미 전역을 공포로 몰아 넣은 ‘타이레놀 독극물 연쇄살인’은 ‘특별한’ 장기미제 사건으로 평가 받는다.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은 정작 따로 있다. 인체의 고통을 덜어주는 작은 캡슐 하나가 치명적인 살인무기로 돌변할 수 있음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것이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는 “타이레놀은 지금도 통증 완화(reliever)와 두려움(fear)이 동의어로 쓰이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작심하고 의약품을 범죄 도구로 삼았을 때 무시무시한 살상 가능성을 경고하는 의미다.

◇독살 무기로 둔갑한 진통제

사건 개요는 간단하다. ‘아무런 접점이 없는 평범한 시민들이 일주일도 안돼 젤라틴 재질의 ‘초강력(extra-strength) 타이레놀’ 캡슐을 복용하고 사망했다.’ 1982년 9월 30일 새벽, 시카고 교외 엘크 그로브 빌리지에 사는 열두 살 소녀 메리 켈러맨은 목이 아프고 콧물이 멈추지 않아 부모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엄마는 딸에게 캡슐 하나를 건넸고, 약을 삼킨 소녀는 몇 시간 후 욕실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같은 날 켈러맨 집에서 10.6㎞ 떨어진 알링턴하이츠의 우편배달부 애덤 야누스(당시 27)는 약을 먹고 호흡이 가빠져 응급실로 실려갔다. 의료진의 신속한 조치에도 그의 심장은 곧 멈췄다. 슬픔에 잠긴 동생 스탠리(25)ㆍ테레사(19) 부부도 두통이 밀려와 무심코 애덤의 약을 복용했고 이들 역시 숨을 거뒀다. 이후 엘름허스트의 전화업체 직원 메리 맥팔랜드(35), 시카고의 승무원 폴라 프린스(35), 넷째 아이를 막 출산한 윈필드의 메리 라이너(27) 등 앞선 4명의 거주지와 멀지 않은 지역에서도 사인이 불분명한 사망 3건이 추가로 보고됐다.

직업도, 연령대도 제각각인 7인의 죽음에 공통분모는 없을 듯 보였다. 그러나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가지 연결고리를 찾아냈다. 사망자 모두 숨지기 직전 타이레놀을 섭취했다는 것, 그리고 독성물질인 ‘시안화물’이 시신에서 검출된 것이다. 우리가 흔히 ‘청산가리’로 부르는 그 독극물이다. 그것도 치사량의 1만배에 달하는 65㎎이 캡슐에 들어 있었다.

수사 결과는 놀라웠다. 미 연방수사국(FBI) 등이 희생자들이 구매한 타이레놀의 공급 경로를 역추적해 봤더니 약품 제조공장과 포장용기를 만든 업체, 소매점이 다 달랐다. 적어도 제조 공정에선 문제가 없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져 제약사인 존슨 앤 존슨은 용의선상에서 빠졌다. 시카고 인근에서만 피해자가 나온 점도 생산 단계에서의 변조 가능성을 배제하는 근거가 됐다.

경찰은 결국 범인이 여러 가게에서 플라스틱 병에 담긴 타이레놀 제품을 구매해 일부 캡슐을 오염시킨 뒤 상점 매대에 다시 진열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미 공영 PBS방송은 “타이레놀은 처방전이 필요 없는데다 말랑말랑한 연질캡슐로 매끈하고 삼키기가 쉬워 특히 인기가 높았다”며 “거꾸로 독극물을 주입하기도 간편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폭탄테러범까지 수사했지만…

‘약물 변조(tampering)’라는, 전대미문 범죄의 여파는 엄청났다. 인터넷도 없던 1980년대 경찰은 거리를 누비며 확성기로 타이레놀의 위험성을 전파했다. 미 시사주간 타임은 당시 기사에서 “전 국민이 말 그대로 타이레놀 병을 처리하기 위해 집으로 달려 갔다”며 공황 상태에 빠진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전했다.

‘모방 범죄’도 활개를 쳤다. 단적으로 타이레놀 사건 후 한 달간 미 식품의약국(FDA)에 신고된 약물 관련 범행은 무려 270건이 넘었다. 쥐약부터 염산을 동원한 공격까지, 범죄자들은 새로운 폭력 수법에 열광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유사 사건은 1986년 워싱턴주 오번에서 일어난 ‘엑세드린 살인’이다. 범인 스텔라 니켈(42)은 남편의 사망보험금을 노리고 캡슐 모양의 진통제 엑세드린에 시안화물을 첨가해 두 명을 독살했다.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범인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원한 범죄인지, 제약사의 몰락을 겨눈 기업 사냥인지 범행 동기조차 종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뉴스위크 기사를 보면 처음엔 타이레놀 공급 창고에서 일한 40대 아마추어 화학자가 수사망에 포착됐다. 순전히 시안화물에 접근하기 쉽다는 배경이 이유였지만 뚜렷한 증거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지지부진하던 수사는 한 통의 편지로 급반전을 맞는다. “추가 살인을 막고 싶으면 100만달러를 보내라”는 협박 편지가 존슨 앤 존슨 본사에 배달된 것. 수사팀은 지문감식 등을 거쳐 세무사 출신 제임스 W. 루이스(35)를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했다. 그 해 12월 FBI가 루이스를 체포했을 때 “백악관을 폭파시키겠다”는 문건도 발견됐다. 문제는 그에게 사건 발생 기간 아내와 뉴욕에 살았다는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어쩔 수 없이 수사당국은 협박에 따른 공갈 및 과거 신용카드 사기 혐의만으로 루이스를 기소했고, 법원은 20년형을 선고했다. 그는 12년의 수형 생활을 마치고 1995년 가석방됐다.

그렇게 끝나는 듯했던 사건은 2009년 FBI가 재수사에 전격 착수하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되살아났다. 수사팀은 루이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 위치한 그의 자택을 압수수색해 사건 관련 물품을 몽땅 가져 갔다. FBI 측은 수사를 재개하며 “법의학 기술의 발전을 감안해 새로운 증거를 찾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불행히도 그 증거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FBI는 심지어 대학과 항공사를 목표 삼아 ‘유나바머(Unabomber)’란 별칭으로 유명한 폭탄테러범 시어도어 카진스키의 유전자 샘플까지 살펴 봤다. 카진스키가 사건 즈음인 1978~80년 시카고 교외에서 최소 4건의 테러를 저질렀다는 정황 증거가 제시됐다. 물론 그는 혐의를 전면 부인했고 조사도 별 소득 없이 종료됐다.

수사당국은 여전히 루이스를 ‘타이레놀 맨’으로 의심하고 있다. 피해자 폴라 프린스가 독극물 약을 구입하는 장면이 담긴 폐쇄회로(CC)TV 사진이 뒤늦게 공개됐는데, 프린스 뒤편에 찍힌 덥수룩한 수염의 남성이 루이스의 인상착의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 역시 추정일 뿐이라 2,000여명이 투입된 수사는 40년 가까이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피해자 폴라 프린스(앞줄 여성)가 독극물이 든 타이레놀을 약국에서 구매하는 장면. 뒤 쪽에 수염 난 남성이 눈에 띈다. 경찰은 이 남성을 유력 용의자인 제임스 W. 루이스로 판단하고 있다. AP 자료사진
피해자 폴라 프린스(앞줄 여성)가 독극물이 든 타이레놀을 약국에서 구매하는 장면. 뒤 쪽에 수염 난 남성이 눈에 띈다. 경찰은 이 남성을 유력 용의자인 제임스 W. 루이스로 판단하고 있다. AP 자료사진

◇비극이 낳은 긍정의 효과

타이레놀 살인은 장기 미해결 사건치곤 이례적으로 굵직한 제도 변화를 이끌어냈다. 사건 직후 미 진통ㆍ해열제 시장에서 점유율 1위(35%)를 달리던 타이레놀의 비중은 7%로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결백이 밝혀진 뒤에도 존슨 앤 존슨은 시장에 출시된 타이레놀 3,300만병을 전부 회수했다. 1억달러, 현재 가치론 2억6,200만달러(약 3,206억원)를 포기한 결단이었다.

불과 7개월 뒤 타이레놀은 점유율을 가뿐히 회복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한 승부수가 먹힌 것이다. 요즘도 이 사건은 기업 위기 대처와 윤리경영의 교과서로 통한다. 타임은 “제품의 안전기준을 제시한 혁명”이라고 단언했다. 이듬해엔 제품 변조를 미국의 연방 범죄로 다루는, 속칭 ‘타이레놀법’이 제정됐고 2중ㆍ3중의 약품 포장도 이 때부터 자리잡았다.

수십 년 전에는 누구나 사먹을 수 있는 캡슐 약이 생명을 위협하는 흉기가 될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7명의 희생 덕분에 오늘날 똑같은 비극을 겪지 않아도 되는 보호장치가 생겨났다. 그래도 유가족의 고통까지 보듬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피해자 메리 라이너의 딸인 미셸 로젠은 2018년 언론 인터뷰에서 “사건의 진실을 규명할 때까지 조사를 중단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잊어도, 잊혀도 될 범죄는 없다.

김이삭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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