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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도] 걸그룹 멤버 엄마, 소매치기 어린시절 딛고 100명의 자식 거두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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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47> AOA 찬미의 금수저 엄마 임천숙
17세 때 태어나 처음 들은 칭찬에 미용사 돼
20년간 미용실을 갈 곳 없는 청소년의 쉼터로
불현듯 그에게 다가온 구원. “아이고마, 참 잘하네! 니는 평~생 미용해서 먹고살 팔자 같다.”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일하기 시작한 미용실 원장의 칭찬이었다. 이 한마디가 삭막하고 막막했던 열일곱 인생에 자존감과 자신감의 샘을 파 주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들어본 긍정의 말이었다. 한마디의 힘을 그래서 깨닫게 됐다. ‘나도 나중에 절박한 이들에게 내 기술을 대가 없이 나눠야지.’ 미용실 원장은 그가 그때까지 만나 보지 못한 선한 어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덟 살 때부터 한 살 터울 언니 손을 잡고 소매치기를 해야 했다. 돈을 벌기는커녕 술과 노름에 빠져 빚만 져온 아버지는 딸들을 버스터미널과 기차역으로 내몰았다. 시키는 대로 소매치기를 하지 않으면 자신이, 언니가, 엄마가, 남동생이 지긋지긋한 폭행에 시달려야 했다. 나쁜 일인 줄 알면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린 그는 생각했다. ‘아, 누군가 내게 손을 내밀어 주면 좋겠다. 누구든 내 손을 잡고 끌어 준다면 고아원이라도 따라갈 텐데.’ 간절한 바람과 달리 자매들에게 손을 뻗은 건 또 다른 악마였다. “힘들재? 나랑 쉬러 가자, 빵 줄게.” 달콤한 아저씨 말에 따라간 곳은 한적한 사무실. 언니에게 몹쓸 짓을 하려던 그 자를 밀쳐내고 자매는 죽도록 뛰어 도망쳐 나왔다.
열일곱 살에 만난 미용실 원장이 그의 인생을 바꿔 놨다. 힘들 때 손을 내밀어 주는 어른의 한마디가 지닌 힘을 일찍이 깨달은 계기다. 그가 자식 셋뿐 아니라 100명이 훌쩍 넘는 아이들의 또 다른 엄마가 되어 줄 수 있었던 이유다.
경북 구미시 황상동에 있는 임천숙(45) 원장의 미용실(‘천찬경 머리이야기’)은 오갈 데 없는 10대들의 오랜 쉼터다. 1999년 이곳에 문을 연 즈음부터 그랬으니 벌써 20년이다. 집이 있지만 들어가지 못하는 아이들, 부모 노릇에 손 놓은 부모를 가진 아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의 미용실을 찾았다. 더러운 얼굴을 씻기고, 엉망인 머리칼을 다듬어 주고, 주린 배를 채워 주고, 교복을 사 입히고, 그만두겠다는 학교로 손을 잡아 끌고 갔다. 아예 데리고 산 아이들도 있다. 아이들은 처음엔 “아줌마”라고 부르다가 어느새 “이모”, 나중에는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라고 했다.
‘벌이가 좀 됐나 보네’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그는 아버지와 꼭 닮은 남편을 만나 수천만 원 빚까지 떠안고 이혼했다. 그가 가리키는 미용실 한편의 커튼 안이 살림집이었다. 좁은 방 두 개에 작은 부엌 하나가 딸렸다. 전체를 따져봐야 21평(69㎡) 남짓인 좁은 공간이지만 여기서 새 인생을 찾아 나간 아이들이 셀 수 없다. 여기는 ‘퀸덤’으로 다시 전성기를 맞은 아이돌 걸그룹 AOA의 찬미(23)씨가 자란 곳이기도 하다. 찬미씨는 임 원장의 둘째 딸이다.
임 원장의 미담이 슬금슬금 퍼지며, ‘찬미의 진짜 금수저 엄마’라는 별칭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임 원장은 손사래를 쳤다. “그런 얘기가 나올 때마다 좀 그래요. 우리 애들한테 나는 한참 모자란 엄마거든요. 찬미한테 막내 맡기고 다른 미혼모 아이 뒷바라지하러 다니기도 했으니, 생각하면 너무 미안해요.”
채 150㎝가 안 되는 작은 키에 긴 머리를 한 소녀 같은 모두의 엄마, 임 원장을 23일 마주했다. 그는 “언론과 인터뷰가 처음”이라며 쑥스럽게 미소 지었다.
◇딸들에게 소매치기 시킨 아버지
-그간 인터뷰 요청이 많았을 텐데요.
“많이 거절했죠. 하지만 이번 인터뷰는 제 인생을 말하는 거니까 다르다고 느꼈어요. 그간 나간 인터뷰 목록을 보고 ‘해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죠. 그런데, 제가 이런 인터뷰를 할 인물이 되나요? 다만, 그런 걱정이 들었죠. 하하.”
-딸들과 상의했다고 하셨잖아요. 반응이 어땠나요.
“저는 뭔가 큰 결정을 하기 전에 늘 딸들과 상의를 해요. 이번에도 단체 카카오톡(단톡방)으로 가족회의를 했죠. 큰애 경미(24)와 막내 혜미(16)는 ‘우와, 대박!’이라면서 괜찮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찬미가 좀 걱정이 됐죠. 찬미 회사를 통해 제의가 많이 들어왔지만 제가 여러 번 거절했거든요. 그런데 찬미도 ‘먼 훗날 되새겨봤을 때 좋은 추억이 될 것 같다면 하면 좋겠어’라고 하더군요.”
-미용실은 어떻게 하게 됐나요.
“제가 집안 형편 때문에 고1 때 자퇴를 했어요. 미용실은 그러니까 (우리나라 나이로) 열일곱 살 때 처음 가게 됐죠. 동네 아주머니가 ‘야야, 엄마 힘든데 용돈이라도 벌어야지. 나 따라와 봐라’ 해서 갔더니 미용실이더라고요. 그 해 7월부터 일했죠.”
-그 전에 미용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나요.
“아니요. 일단 돈을 벌어야 하니 갔어요.”
-학교까지 그만둘 정도로 집이 어려웠나요.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서 언니는 고2, 저는 고1, 남동생은 중2 때 모두 학교를 그만뒀어요.”
-빚이 많았나요.
“빚도 있었지만, 아버지 때문이죠.”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나요?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음… 흔히 말해 집에서는 독불장군, 밖에선 호인이었죠. 술 좋아하시고, 노름도 좋아하시고. 제 기억에 딱히 직업이 없었어요. 제가 초등학교 1, 2학년 때부터는 아버지가 언니랑 저를 데리고 다니면서 안 좋은 일을 많이 시켰죠.”
-뭔가요?
“소매치기요. 언니와 제가 (소매치기를 해서) 뭔가를 안 가져가면 아버지한테 맞으니까 어쩔 수 없이 했는데, 하면서도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누군가 어른이 나한테 손을 내밀어 주면 그 손을 잡고 가고 싶다는. 그런데 아무도 잡아 주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여덟 살이면 정말 어린 나이인데, 그런 일을 시켰다니요.
“여덟 살이면 어떤 사람 눈에는 아이지만, 어떤 사람 눈에는 뭔가를 시키면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거죠. 자기 자식이나 아이가 아니고요. 그러니 쉽게 원하는 걸 시키고 안 하면 화를 내고 때리는 거죠. 많이 맞았어요.”
-지워질 수 없는 기억이겠죠.
“잊힐 수 없죠. 그 기억 때문에 ‘나쁜 일’의 선이 그어진 것 같아요.”
-얼마나 견뎌야 했나요.
“2, 3년 정도요. 내가 안 하면 내 동생을 시키니까. 동생은 더 어리잖아요. 또 내가 안 하면 언니가 맞고, 동생이 맞으니까. 어머니도 참 좋은 분이기는 하지만, 어머니도 (아버지를)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죠. 어머니도 많이 맞았으니까. 어머니가 돈을 벌어오면 아버지는 갖고 나가요. 파출부, 청소, 분식집… 어머니도 안 해본 일이 없죠.”
-소매치기는 어떻게 끝냈나요.
“아버지가 교도소에 들어가면서요. 우리가 (소매치기를) 하다가 (경찰에) 걸렸거든요.”
-무서웠겠어요.
“그럼요. 지금도 형사들을 보면 제일 무서워요. 어른이 시켰으니 내 잘못은 아니라는 건 아는데,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고요. 그런데 제대로 말하기 전까지 집에 보내주지 않더라고요. 계속 마치 때릴 것처럼 윽박지르니 경찰서 한편의 의자에서 언니랑 이틀을 고민하다가 말을 했죠.”
-어떤 고민이었나요.
“언니랑 저랑 둘이 서로 쳐다보면서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했죠. 사실대로 말하자니 아버지한테 맞아 죽을 것 같고, 말을 안 하자니 형사한테 맞을 것 같더라고요. 말을 하면서 ‘아버지한테 죽겠구나’ 했죠. 하지만 속은 시원했어요. 잘못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학교 대신 미용실로
그의 아버지는 1년 정도 복역한 뒤 나왔다. 출소해서도 별반 달라진 건 없었다. 때리는 것도 똑같았다. 그래도 소매치기는 시키지 않았다. 대신 남의 집에 가서 돈을 빌려오라고 내몰았다. 아버지가 노름으로 진 빚은 점점 불어났다. 어느 날 그의 언니가 아버지에게 대들어 크게 싸운 게 탈출의 계기였다. ‘이러다 일 나겠다’고 생각한 어머니가 아이들을 데리고 한밤에 대구를 떴다. 충북 제천까지 가 며칠을 지내다 다시 경북 상주시의 함창읍으로 왔다. 가내수공업으로 삼베 짜는 일을 하면 내어 주는 문간방에서 네 식구가 살았다. 모두 돈을 벌어야 먹고살 형편이니 학교는 다 그만둬야 했다. 그런 사정을 딱히 여긴 동네 아주머니가 그를 미용실에 소개시켜 준 거다.
-따라가 보니 어땠나요.
“원장님이 제 머리부터 다듬어 주더라고요. 그때까지 집에서 어머니가 잘라줬거든요. 머리도 남자 아이처럼 짧았죠. 원장님이 ‘니 이름이 뭐꼬’ 하시기에 ‘천숙인데요’ 했더니 ‘천식이’로 알아들으신 거예요. 그 뒤로 저를 ‘식아’라고 부르셨죠. 처음부터 ‘식아, 이거 빨리 해봐라’라면서 쉽게 시켜주니 정말 고맙더라고요. 나처럼 어리고 작아도 뭔가를 배울 수 있구나 싶어서. 그 뒤로 시키는 건 정말 열심히 했죠. 롤(파마 마는 도구)을 씻고 파지(파마에 쓰는 종이)를 개어놓고 커피 타는 법도 배우고요. 3일을 일하고 나니 원장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니는 어디서 일을 해 봤나?’ 제가 ‘처음인데요’ 했더니, ‘니는 평생 미용해서 먹고살 팔자 같다’면서 잘한다고 칭찬을 하시는 거예요. 진짜 내가 잘하는 줄 알고 미용 기술을 잘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 칭찬이 특별했나요.
“제가 초등학교 6년 동안만 12번이나 이사를 다녔어요. 제대로 학교를 다니지 못 했죠. 그러니 공부를 잘할 리가 없잖아요. 전체가 70명이면 68등을 했어요. 그때는 공부를 못하면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바보야, 공부도 못하는 이 바보. 니가 뭘 할 줄 아노’ 했던 시절이죠. 하도 바보 소리를 들어서 저는 진짜 제가 바보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원장님이 참 잘한다고 하니까 이거 제대로 배워야지 싶었죠.”
-태어나서 처음 들은 칭찬이었나요.
“그렇죠.”
-월급도 받았나요.
“첫 월급이 5만원이었어요. 돈을 주시면서 원장님이 첫 월급으로 어머니 내복 사드리는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그때가 8월이었어요. 그래서 세 장이 든 엄마 팬티를 샀죠. 또 당시 저희 집에 시계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알람이 되는 탁상시계 2만 1,000원짜리를 샀더니 8,000원이 남더라고요. 그걸로 수박을 사서 가족이 다 같이 나눠먹었죠.”
-그 원장님은 잊을 수 없겠네요.
“그럼요. 지금도 연락하며 지내요. 아직도 ‘식아’라고 부르세요. (미소) 이월순 원장님이죠. 연세가 76세이신데 아직도 미용실을 하세요. 한 자리에서 50년이 넘었죠. 나도 건강만 잘 관리하면 그렇게 할 수 있겠구나 싶어요. 저한테는 정말 힘이 되는 분이죠. 지금 생각하면 사람을 다룰 줄 아는 분이기도 했어요.”
-왜 그렇게 느꼈나요.
“제가 아침 7시에 사복을 입고 출근하는데, 맞은 편에서 다른 또래 친구들이 교복을 입고 학교를 향해 걸어오고 있더라고요. 처음에는 돈을 벌 수 있으니 미용실 출근길이 감사하고 좋아서 신나게 다녔는데, 서너 달 지나면서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 쪽으로 교복을 입은 애들이 오고 나는 사복을 입고 그 사이를 뚫고 출근하는 게 정말 창피했어요. 한동안 골목으로 숨어서 출근을 했죠. 그러다가 어느 날 원장님한테 말도 않고 안 나갔어요. 그리고는 동네 작은 다리 밑에 숨어서 하루 종일 있었죠.”
-무슨 생각을 했나요.
“아무 생각 없이 ‘시간아 빨리 가거라’ 했죠. 저녁 8시가 지나야 집에 갈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는 다음날 출근했죠. 잘못을 했으니 너무 무섭더라고요. 일찌감치 미용실로 가서 빼꼼 안을 쳐다보니까 ‘식아, 빨리 들어온나(들어와라)’ 하시더라고요. 전날 결근했는데도 잘해주시더라고요. 죄송해서 더 열심히 일했죠. 그런데 사람이 참 간사해요. 결근했는데 더 잘해주니까 며칠 뒤에 또 안 나갔어요. 그런데 그 다음날도 잘해주시는 거예요. 며칠 뒤에 또 그랬죠. 그때는 엄청나게 혼났어요. ‘이런 식으로 하려면 관둬라. 이게 장난인 줄 아느냐. 한두 번이야 어린 마음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받아줬지만, 계속 그러려면 나가라’고 하셨죠. 관두라는 말이 너무나 무섭더라고요. 나가면 갈 곳이 없었거든요. 그걸 제가 잊고 있었던 거예요. 싹싹 빌었죠. 그때 생각했어요.”
-뭘요?
“미용 기술을 정말 제대로 배워서 나도 이걸로 먹고살 수 있게 된다면, 이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람한테 내가 배운 만큼 돌려주겠다고요. 그래서 지금까지 여유 있거나 다른 선택지가 있거나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것 아니면 안 되는 절박한 사람들에게 돈 받지 않고 가르쳐 왔어요.”
-학교 가고 싶은 마음은 그대로였을 텐데요.
“그렇게 1년이 지나고 어머니한테 말했죠. ‘엄마, 나 학교 보내주면 안돼?’ 엄마가 돈 없어서 못 보내 준대요. 몇 달 있다가 또 물었죠. ‘엄마, 학교 보내주면 안돼?’ 그랬더니 ‘그래(그렇게) 가고 싶나’ 하시더라고요. ‘응, 너무 가고 싶어’ 했더니 엄마가 산업체 부설 학교란 데가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회사에 다니면서 야간에 학교에 다니고 등록금은 회사에서 대주는 거죠. 숙식도 제공해 주고요. 그래서 대구에 있는 산업체 부설 학교에 들어갔어요. 회사 다니면서도 주말에는 미용실에 가서 일을 계속 했죠. 미용사 자격증도 두 달 만에 땄어요. 산업체 부설 학교에 3년을 다니면서 받은 월급으로 적금을 부었죠. 졸업하면서 모은 돈 1,000만원을 엄마한테 드렸어요.”
그 시절로 돌아간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월급을 27만원 남짓 받았다니 거의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은 돈이었을 테다.
“하나도 아깝지 않았어요. 엄마도 고생을 너무 많이 하셨으니까. 1년 뒤에 그 중 500만원으로 저 결혼을 시키셨죠.”
◇갈 데 없는 아이들 쉼터가 된 미용실
-왜 그렇게 일찍 결혼을 했나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 살 차이였어요. 그래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면, 남자가 철 들고 가정 건사도 잘 할 줄 알았죠. 일찍 결혼하고 싶었던 이유가 또 있었어요. 어머니한테는 좀 미안한 말인데, 제가 열일곱 살 때 엄마가 재혼을 했는데 그때부터 집에 가도 편히 쉴 수가 없더라고요. 새 아버지가 좋은 분이고 잘해주셨지만요. 그래서 결혼을 일찍 하면 내 안식처가 생기지 않을까 했죠. 하지만 막내를 낳고 서류 정리를 했어요.”
-이유가 뭔가요.
“두 달 연애하고 결혼했는데, 어떻게 보면 내 눈을 내가 찌른 격이죠. 엄마가 엄청 반대를 했거든요. 상견례 때는 아예 엄마가 밥도 안 먹고 돌아 앉아 계셨어요. 그때 제 눈에는 보이지 않았죠. 살아보니 아버지하고 똑같은 거예요.”
남편이 대출에, 사채까지 끌어다 쓰는 바람에 진 빚이 1억 2,000만원이나 됐다. 결혼한 이후 집에 월급을 가져다 준 적도 없었다. 술값에, 노름으로 돈을 탕진하고 빚에 빚을 진 결과였다. 집으로 사채업자들까지 찾아왔다. 한동안 아이들이 양복 입은 남자들만 보면 벌벌 떨 정도였다. 결국 빚을 7,000만원 떠안겠다고 하니 남편이 이혼에 합의했다. 양육권도 넘겨 받았다. 미용실을 하며 10년에 걸쳐 빚을 다 갚았다.
-그러면 막내를 가졌을 때 마음 고생을 엄청 심하게 했겠네요.
“6개월 간 임신한 줄을 몰랐어요. 화병 때문에 하혈을 하는 줄 알았죠. 병원에 가보니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하고요. 초음파로도 아이가 안보였어요. 한의원에 가봐도 맥도 잡히지 않고요. 막내가 나한테 올 운명이었던 거죠. 예정일보다 25일을 일찍 태어났어요. 낳기 전날까지 일을 했어요. 돈을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했으니까요. 그때는 밤 12시에도, 새벽 1시에도 머리를 하고 싶다는 손님이 있으면 했어요. 애를 봐줄 사람이 없으니 시가로 새벽 2시까지 짐을 옮겨놓은 날 아이가 태어났어요. 이혼하기 전이었으니까요. 잠시 쪽잠을 자는데 양수가 터지더라고요. 그런데도 새벽 6시에 시어른들 밥해 드리고 첫째, 둘째 학교 전학 처리까지 했죠. 그랬더니 배가 아프더라고요. 아이 낳고 이틀 만에 퇴원해서 다시 일을 했어요. 아이는 미용실에 눕혀놓고요.”
-청소년들은 어떻게 이 미용실을 쉼터처럼 드나들게 됐나요.
“제가 처음 미용실을 열 때가 스물여섯이었거든요. 동네에선 어린 편이었죠. 젊은 미용사가 하니 머리도 세련되게 한다고 생각했는지 학생들이 많이 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청소년들이 많이 오니 대화를 잘하고 싶어서 시에서 교육해 주는 미술심리치료나 심리상담도 배웠죠.”
-왜 그렇게까지 하고 싶었나요.
“나도 힘들게 살아 봤고, 나쁜 짓도 해 봤잖아요. 잘 곳이 없어서 한겨울에 논바닥에 쌓아놓은 짚을 파헤치고 구멍 안에 들어가 자보기도 했어요. 아침에 일어나 논두렁 물로 세수하고요. 사람이 먹을 것, 잘 곳이 없으면 자기도 모르게 나쁜 짓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요. 그런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 ‘손님 애들’이 있다면 최소한의 도움만 줘도 나쁜 마음은 안 먹을 거예요. 먹을 게 없으면 다른 애들 돈을 빼앗아서라도 먹고 싶은 게 사람 심리거든요. 하지만 배부르고 등 따시면(따뜻하면) 그런 생각을 안 하죠.”
-‘손님 애들’이요?
“네, 호칭이에요. 손님이지만, 손님이 아니면서 아이들이니까요. 지금은 서른 살이 된 아이도 있으니 아이라고 하면 안 되지만. 하하.”
-힘든 환경에 있다는 게 감지가 되던가요.
“그럼요. 기억에 남는 손님 애들 중에 둘째랑 동갑인 아이가 있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우리집에 왔죠. 들어오는데 정말 얼굴이고 옷이고 때가 가득이더라고요. 머리를 하러 온 것도 아닌 듯하고요. ‘니 세수 좀 하자. 잘 생긴 얼굴로 이래(이렇게) 다니면 쓰겠나’ 해서 화장실로 데려갔더니 처음 본 저한테 이렇게 얼굴을 대주더라고요. 씻긴 뒤에 밥 먹고 가라고 라면을 끓여 줬죠. 생각하면 마음이 많이 아파요. 그런 식으로 한두 명이 오다 보니 아이들 입을 탔나 봐요. 자기들끼리 갈 곳이 없으면 ‘이모집에 가자’하면서 오는 거죠. 그러다가 친구의 친구도 오고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됐어요.”
아이들은 미용실에서 간식도 먹고, 잠을 자기도 하고, 밥도 먹었다. 데리고 사는 아이들도 있었다. 생일엔 아이들에게 미역국도 끓여줬다. 명 길게 살라고 생일상엔 꼭 잡채를 올렸다.
◇또 다른 엄마가 되어 주다
-손님 애들한테는 이곳이 미용실이 아니었겠네요. 뭐라고 여기고 왔을까요.
“엄마이지 않을까요. 엄마가 있기는 한데 엄마가 없는 아이들이 많더라고요. 하지만, 아이들이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 하는데 바로 ‘어’ 하지를 못 하겠더라고요. 그러면 정말 내가 내 자식으로 생각하고 건사해야 하는 거잖아요. 잘못을 했으면 때려서라도 가르치고요. 한번은 한 아이가 엄마라고 불러도 되냐고 하기에 며칠을 고민하다가 그러라고 했지요. 얘를 진짜 장가 보내 좋은 가정 꾸릴 때까지 책임질 생각이었죠. 저도 유독스레(각별하게) 챙겼고요. 그런데 한번은 잘못된 행동을 반복하기에 들고 있던 머리 빗으로 때렸더니 욕을 하면서 나가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어요. 내가 엄마는 될 수 없다는 걸요.”
-그런데 형편도 안 좋을 때 그 많은 아이들을 어떻게 먹이고 입혔나요.
“(이혼) 서류 정리한 뒤에 모자 가정 지원을 신청했어요. 그랬더니 한 달에 쌀 20㎏이 (정부에서) 나오더라고요. 얼마나 좋던지. 또 기초생활수급자에게 지급되는 쌀 중에서 남은 건 반값 이하로 팔아요. 라면도 그렇고요. 그런 쌀과 라면을 사다가 충당했죠. 방법은 다 찾으면 있어요!”
그의 눈이 반짝였다.
-힘들진 않았고요?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나 봐요. 나는 어른이고 돈을 벌 수 있으니 아이들에게 그렇게 해줘야 한다고 당연하게 여겼죠. 내 자식만 잘 키우면 무슨 소용이에요. 내 자식이 귀한 만큼 남의 자식도 잘 되면 좋잖아요. 그러면 좋은 에너지가 퍼질 거고요.”
-딸 셋과 함께 지내야 했는데 걱정은 안 되던가요.
“하나도요. 아무리 밖에서 나쁜 짓을 한 놈이라고 해도 내 집에서 믿음을 주면 나는 내가 보이는 대로 아이를 믿었어요. 저도 어릴 때 나쁜 행동을 어쩔 수 없이 했지만, 어느 날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생겼거든요. 이 사람한테만큼은 내가 어떻게 살았든 바른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진실되게 행동하는 거죠. 이 손님 애들한테는 내가 그런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엄마를 공유해야 했던 딸들의 불평은 없었나요.
“언젠가 첫째랑 둘째가 그러더라고요. ‘엄마, 엄마는 언니, 오빠들 엄마야, (아니면) 우리 엄마야?’ 제가 ‘너희 엄마지’ 하고 나니 밖에 있던 손님 애들한테 미안해지더라고요. 아이들이 양손에 음식을 들고 먹는 버릇이 생긴 적도 있어요. 내려놓고 먹으라고 하니까 ‘언니, 오빠들이 언제 먹을지 모르잖아’ 하더라고요. 미용실 한 편에 딸린 방, 게다가 늘 북적북적하니까 집 같은 집에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을 거예요. 다른 친구들의 집을 많이 부러워했으니까요.”
-손님 애들 중에는 아무리 잘해 줘도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경우도 있었겠죠.
“그렇죠. 지금 들어가 있는 아이도 있고요.”
-어디에요, 교도소요?
“네, 정말 제가 공을 많이 들였던 아이죠. 중학교도 가지 않으려는 걸 손목 붙잡고 교복 사 입혀 입학시켰지만 고등학교도 안 갔죠. 그 뒤에도 경찰서에 조사받으러 왔다 갔다 하고 재판 받으러 다니고…. 아까 세수 시켜줬다는 그 아이예요. 정말 정이 많이 가서 아들로 키우고 싶을 정도였죠.”
-그 아이는 왜 그렇게 됐을까요.
“환경 탓이죠. 엄마는 제대로 아들을 제어할 능력이 없고 주위 사람들은 그쪽 세계(조직폭력배) 생활을 하고요. 처음 배운 재주가 (남의) 차 문 따는 거였고요.”
또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도 잘 커서 미용실도 하고 가정도 꾸리고, 저처럼 살고 싶다면서 대학 들어가 봉사동아리 하는 아이들도 많아요.”
-그렇게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손님 애들이 얼마나 되나요.
“100명 정도 될 거예요.”
-그럼 그간 쉼터 삼아 미용실을 거쳐간 손님 애들이 대략 몇 명쯤 될까요.
“한 200, 300명은 되지 않을까요. 정확히 세어보진 않았지만.”
◇우울의 늪에서 찬미를 건져내기까지
화제의 아이돌 걸그룹 AOA의 멤버 찬미씨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가 찬미씨죠. 데뷔를 어떻게 하게 됐나요.
“초등학교 2학년 때 춤을 배웠어요. 에너지가 많은 아이들은 몸을 움직이는 걸 가르치면 좋다고 해서요. 구미에 재즈댄스 학원이 있어서 보냈죠. 처음엔 남들은 한 달이면 춤 하나를 다 배우는데 찬미는 두 달이 걸리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재미있었나 봐요. 발목을 다쳐서 어차피 춤을 추지도 못하는데 가서 구경을 하더라고요. 보기만 해도 좋다면서. 그렇게 꾸준히 2년을 하니까 남들보다 실력이 눈에 띄게 늘었어요. 울산 현대모비스 어린이 치어리더단을 했는데 우연히 스포츠신문에 크게 나면서 ‘TV는 사랑을 싣고’ 같은 프로그램에서 어린이 재연 배우도 하고 홈쇼핑 채널에도 출연했죠. 당시 JYP, SM, FNC, 큐브 이런 엔터테인먼트 회사 일곱 군데에서 연락도 왔어요. 어차피 서울에 갈 일이 있어서 JYP와 FNC 미팅 약속을 잡아뒀는데 FNC로 갔죠. 큰 아이의 권유였어요. ‘FNC에 걸그룹이 없으니 혹시 아느냐’는. 갔더니 40, 50명 정도가 대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잘 봤으니 다 돌아가라더니 저랑 찬미한테는 남으래요. 몇 명 더 만나고 나니 그날 계약을 하자기에 사기인 줄 알고 그 길로 다시 구미로 내려왔죠. 둘째는 그 사이에 벌써 꿈에 부풀어 있고요. FNC에서 두 달 동안 연락을 해왔어요. 이제부터 저희가 잘 키울 테니 믿고 보내달라고요.”
-열다섯 살 때인데요.
“맞아요. 처음에는 몇 달 있다가 내려올 줄 알았어요. 내 딸이 연예인이 될 거라는 생각은 못 했죠. 다만 둘째가 춤을 정말 좋아하고 더 배우고 싶어하는데 제가 가르치는 데 한계가 느껴지더라고요. 더 큰 곳에서 더 좋은 선생님한테 배우게 하고 싶은데 그러질 못 했죠. 비싼 과외를 받게 한다는 생각으로 올려 보낸 거예요.”
-연습생 생활이 보통 힘든 게 아닌데 그걸 견뎠네요.
“찬미가 그러더라고요. 그때가 자기한테 오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고요. 무조건 버텨서 끝장을 보자고 결심했대요. 데뷔하기까지 연습생끼리 계속 배틀을 붙여서 살아남는 사람을 데뷔시키거든요. 테스트할 때도 춤, 보컬, 랩은 기본이고 일주일에 두 권씩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 내야 했어요. 또 패션 잡지를 주면서 자기 코디를 어떻게 할 건지 스크랩해서 제출하라기도 하고요.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연습생 중에서도 동영상을 찍어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은 제외하는 과정을 거치더라고요. 그런데 그 1년의 과정에서 한 번도 떨어지지 않고 계속 올라가더라고요. 그러더니 어느 날 ‘엄마, 나 데뷔조래’ 하더라고요.”
1년 2개월 만인 2012년 7월 찬미씨는 AOA로 데뷔했다.
-처음 TV에서 찬미씨를 보고 어땠나요.
“친정 엄마랑 함께 울었어요. 보통 수년에 걸쳐서 준비하는 걸 1년 만에 압축해서 했으니 얼마나 고생을 했겠어요. 연습생 시절에 제가 거의 매일 구미에서 서울까지 기차로 출퇴근 했죠. 밤에 미용실 마치면 막차로 올라가서 아이 나가는 거 보고 아침 기차로 내려왔어요. 그러니 애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죠. 처음엔 서울에 살 집 보증금을 구하지 못해서 친정 엄마가 전세 집을 빼서 서울로 올라가서 함께 지내셨어요. 대신 제가 생활비와 월세를 대고요.”
-그 힘든 과정을 거쳐 데뷔했으니 이제 꽃길일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요.
“데뷔하고도 수입이 없었어요. 5년 만에 처음으로 정산(손익분기점을 넘을 때 이뤄지는 수익 분배)을 받았죠. 데뷔 4년째인 2016년 첫 정산을 받았다고 알려지기도 했는데, 그건 엄밀히 말해 제대로 된 정산이 아니었어요. 게다가 찬미는 데뷔하고 3년쯤 됐을 때 우울증을 심하게 앓기도 했죠.”
-마음이 많이 아프셨겠어요.
“어느 날 오후 4시쯤 찬미 회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찬미가 아침부터 없어졌다고요. 그때 회사에서 못쓰게 해서 찬미가 휴대폰도 없었거든요. 아이패드로 이메일만 주고 받았어요. 이메일을 넣으니 답이 오더라고요. 그래서 미용실 일을 황급히 정리하고 기차로 서울에 올라가서 다시 이메일을 보냈죠. 만나서 밥 먹었냐고 물으니 안 먹었대요. 데리고 식당에 가는데 한 숟가락도 안 먹더라고요. 같이 모텔 가서 자고 다음 날 한강에 가서 있었어요. 그때까지 아무 것도 물어보지 않았죠. 사흘째 찬미가 그러더라고요. 아무리 노력해도 올라갈 수 없고, 이제는 내려가는 것 밖에는 안 보인다고요. 회사를 나오고 싶다고. 그런데 위약금이 투자 금액의 3배였어요. 수십억 원이죠. 당장 이것 저것 다 끌어 모아도 2,000만원뿐이더라고요. 그래도 찬미한테 죽을 만큼 싫으면 나오라고 했어요. 어떻게든 엄마가 책임지겠다고. 그랬더니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지’ 하면서 다시 들어간다더군요.”
-그 뒤로는 어떻게 됐나요.
“제가 너무 불안하고 무섭더라고요. 숙소가 아파트 9층이었는데 뛰어내리면 어쩌나 너무 걱정이 됐어요. 그래서 매일 서울로 제가 기차로 올라갔어요. 일 마치면 밤 기차 네 시간 타고 올라가서 찬미 보고 아침 기차로 내려와서 미용실을 열었죠. 찬미가 두 달간 제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도 하지 않더라고요. 보통 새벽 4시나 6시에 숙소를 나서는데,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나갔죠. 두 달을 매일 서울로 그렇게 다니니까 제가 살이 36㎏까지 빠졌어요. 인플루엔자에 걸려서 어느 날 쌍코피가 터지더라고요. 그걸 보더니 둘째가 ‘엄마, 나 이제 괜찮아’ 하더라고요.”
-그때 어떠셨어요.
“‘아, 이제 찬미가 살겠구나. 다행이다’ 싶었어요. 찬미가 나중에 너무 미안하고 고맙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때는 몰랐다고. 그런데 어느 날 눈을 떠보니까 자기 앞에서 엄마가 죽겠더래요. 그제야 보이더래요.”
◇그가 누구든 ‘사람 대 사람’으로
AOA는 데뷔 7년 만에 다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올해 8~10월까지 방영된 걸그룹 컴백 경연 프로그램 ‘퀸덤’ 덕분이다. AOA는 걸그룹의 고정관념을 뒤엎은 ‘너나 해’ 무대로 호평을 받았다. 코르셋 대신 검정 수트를 입고 무대를 휘저으며 외쳤다. “나는 져버릴 꽃이 되긴 싫어. I’m the tree(나는 나무다).” 남성 댄서의 보깅 댄스(게이나 여장 남자들의 춤)는 곧 미러링(성별을 바꿔 보여주기)이었다.
-최근 ‘퀸덤’으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죠.
“그 프로그램 시작할 때 둘째가 크게 기대는 하지 말라고 그러더라고요. 그 전에도 그런 경연 프로그램에 나간 적이 있는데 잘 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예상과 달리 ‘퀸덤’이 정말 잘돼서 천만다행이에요. AOA가 최근 3년 동안은 일이 거의 없었거든요. 바닥을 쳤죠. 그런데 찬미가 ‘퀸덤’으로 6개월 동안 하루도 못 쉬었다고 하면서도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하더라고요. 지금처럼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요.”
-자녀들이 어떻게 살았으면 하나요.
“보통 꿈이 뭐냐고 물을 때는 초ㆍ중ㆍ고부터 대학까지 마치고 나서 어떤 직업으로 돈을 벌면서 살겠느냐는 뜻이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처음에 미용실만 차리면 떼돈을 벌 줄 알았어요. 하하. 그런데 그간 남들보다 못 벌지 않았는데도 돈이 없네요. 돈을 좇아서 가도 내 돈이 안 되더라고요. 내가 정말 좋아서 재미있게 무언가를 할 때 내 등 뒤에 따라오는 돈만 내 돈이구나 싶어요. 경미(큰 딸), 찬미도 어려운 시절을 많이 겪어서 돈에 집착이 강해요. 하지만 저는 그러죠. 돈을 따라가면 절대 내 돈이 되지 않는다고요. 즐겁게 재미있게 일하다 문득 뒤돌아보니 와 있는 돈이 내 것이라고요. 그리고 몸과 마음이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자주 해요. 큰애도 서울에서 대학 다니면서 돈을 벌거든요. 두 아이가 떨어져있으니까 혹시나 몸과 마음이 다칠까 봐 그게 걱정이 돼요. 몸이 힘들어서 좀 다쳐도 정신이 건강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으니까 항상 몸과 마음이 건강하면 좋겠다는 말을 그래서 누누이 해요.”
-그렇게 사셨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남들보다 돈이 좀 없어요. 하하. 아직도 여기서 월세로 사니까요.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다 보니 그렇죠. 하지만 그래서 재미있게 살고 있어요. 지금 딱 이렇게 사는 게 정말 좋아요. 빚도 다 갚았고, 5,000원짜리 티셔츠라도 내 맘대로 사 입을 수 있고요. 과거로 돌아가라면 절대 가고 싶지 않아요. 다시 젊어질 기회를 준다고 해도 그때만큼 열심히 살 자신이 없으니까요. 지금이 행복해요.”
-앞으로 남은 인생의 꿈이 있나요.
“교도소 봉사를 오래 했어요. 재소자와 펜팔도 하고요. 재소자들이 출소해서 사회에 적응하기가 아주 어렵다는 걸 잘 알죠. 잘못을 해서 들어갔지만, 나와서는 자리를 잡고 잘 살아야 하잖아요. 그래야 내 가족도 안전하게 살 수 있죠. 잘 적응하려면 일이 필요한데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기술이 없으면 또 잘못을 저지르게 돼요. 그런데 미용 기술을 배워두면 먹고살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재소자들에게 미용 기술을 가르치는 봉사를 하고 싶은데 법규상 가위를 갖고 배울 수가 없대요. 무기가 될 수 있어서. 지금 교도소 안에서 하는 미용 교육은 가위를 사용하지 않는 기술인 듯해요. 그래서 나중에 나이 들어 방법만 찾는다면, 교도소에 들어가 살면서라도 사회에 나와 써먹을 수 있는 미용 기술을 가르치는 봉사를 하고 싶어요.”
열일곱 살 가위를 처음 잡았을 때 벼랑 끝에 선 이들에게 이 기술을 나누며 살겠다고 다짐한 결심의 연장선인 셈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지키려고 해온 삶의 도가 뭔지 궁금해요.
“저의 롤모델이 있어요. ‘지란지교를 꿈꾸며’(유안진)라는 시예요.”
그가 바로 옆 책장에서 낡은 책을 꺼내 왔다. 한눈에 봐도 여러 번 읽은 흔적이 뚜렷했다. 읽을 때마다 날짜와 이름을 적어 놓기도 하고, 형광펜으로 밑줄도 그어져 있었다.
“처음 미용실에서 일하던 열일곱 살에 저보다 한 살 많은 오빠가 이 시를 적어서 줬어요. 저를 좋아했나 봐요. (미소) 이렇게 큰 도화지에 이현세의 만화 ‘까치’를 본 떠 그림을 그리고 한쪽에 이 시를 적어서 줬어요. 보는데 촛불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이 시처럼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는 “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냉면을 먹을 때는 농부처럼 먹을 줄 알며, 스테이크를 자를 때는 여왕보다 품위 있게, 군밤을 아이처럼 까먹고, 차를 마실 때는 백작보다 우아해지리라” 같은 구절을 읊었다.
“우리 손님 애들을 대할 때도 아이가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대하려고 노력했죠. 여자든, 남자든, 나이가 몇 살이든, 직업이 뭐든요. 어릴 때 제가 일한 미용실 원장님께 느낀 것도 그거였거든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월순 원장님은 인생에서 어떤 존재였나요.
“저희 엄마한테는 미안하지만, 그때 제게는 엄마 같은 느낌이었죠. 1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따뜻함도 강함도 배웠어요.”
인터뷰 내내 풍겼던 향기의 정체를 알았다. ‘지란지교를 꿈꾸며’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芝蘭)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모든 걸 말라 죽일 듯한 척박한 삶에서, 임천숙이라는 난초의 싹을 틔우려 물을 준 이가 있었고, 꽃을 피워 낸 그가 다른 지란을 북돋고 있다. 그렇게 향기를 퍼뜨리며 사는 그에게 이 시는 목표도, 미래도, 꿈도 아닌 현재 그 자체다. 들풀 같은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른 어디서도 맡을 수 없는 인생의 향기에 취했다.
김지은 논설위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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