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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도] 연세대를 자퇴했다, 장애동생과 산다, 영화로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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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22>생각 많은 둘째 언니, 감독 장혜영
세상은 동생에게 ‘어른이 되면 할 수 있다’고 주문을 걸었다. 중증 발달장애가 어른이 되면 정말 나을 수 있는지, 어른이 된다는 건 뭔지, 언제 어른이 되는 건지,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진작 어른이 된 건 언니인 그녀였다. 동생을 낫게 하겠다고 엄마가 종교에 매달리는 동안, 아빠가 생계로 몸을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동생을 돌보는 건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 ‘동생을 잘 돌보면 엄마, 아빠가 기뻐해.’ 그녀는 자신의 이름보다 ‘혜정의 언니’라는 역할을 먼저 받아들였다.
열세 살 동생을 장애인수용시설에 맡기겠다는 부모의 통보로, 그녀는 처음 혼자 남겨졌다. 그리고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누구지. 뭘 좋아하지, 뭘 싫어하지.’ 나이 열넷이 될 때까지 자신을 중심에 두고 생각해본 적이 없던 거다. “‘혜정의 언니’라고 생각하면 지금 당장 무얼 해야 하는지가 떠올랐는데, 동생이 없어지니 뭘 해야 할 지 모르겠더라고요.”
‘장혜영’(31)이란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각인 시킨 건 연세대에 다니던 2011년이었다. 학내에 ‘이별 선언문’이란 대자보를 써 붙이고 공개 자퇴한 바로 그 사건 때문이다. 서울대 유윤종씨, 고려대 김예슬씨와 함께 ‘SKY 자퇴생’으로 언론에 오르내렸다. “대학을 다니면서 내린 결론이 이 세상을 사는 데 대학 졸업장은 필요 없겠다는 거였어요. 명문대 타이틀로 사람을 판단하는 게 우습다고도 생각했고요. 그런데도 나중에 나 역시 졸업장에 기대게 될까 봐 그럴 여지까지 깔끔하게 없애고 싶었죠.” 4년 간 등록금을 대준 장학회 행사장에 나가 “4년간 장학금을 받아 얻은 귀한 결론”이라며 ‘자퇴 선언’을 했으니 말 다했다. “속으로 ‘지원금 도로 내놓으라고 하면 어쩌나’ 걱정 했는데, 다행히 환수 조건이 없더라고요. (웃음)”
대학을 벗어나 2년을 떠돌았다. 친구, 그 친구의 친구를 타고 유영하듯 세계를 다녔다. 재워줄 이가 있고, 영어와 일어가 가능했으며, 일할 수 있는 몸이 있으니, 비행기 삯만 벌면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결국 돌아왔다. 동생 혜정에게로다. “늘 마음 속에 있었어요. 내가 언젠가는 책임져야 한다는.”
장애인시설에 살던 동생을 데리고 나오기로 결심했다. 동생의 삶에서 생각해보니, 그건 당연했다. ‘생각의 시작을 동생의 삶에서 해보라’는 장애인 인권 활동가의 말 덕분에 깨달았다. “동생에게 일어났던 일들에 저를 대입해보는 순간 말할 수 없는 수치심에 휩싸였어요. 동생은 발달장애인이니까 시설에서 사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거죠. 내가 만약 열세 살 때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부모님이 낯선 시설로 데려갔다면, 거기서 17년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끔찍했어요.”
그때부터다. 동생과 함께 사는 것에 인생을 걸었다. 열심히 돈을 모으고, 한 편으론 동생과 지내는 시간을 서서히 늘려갔다. 동생에게 시설 밖의 세상을 느끼게 했다. “언니랑 살래?” “그래!” 마침내 동생은 마음을 열었고, 17년 만에 자매는 다시 한 집이다.
스티커사진 찍기가 취미이고, 히딩크 감독의 광팬이며, 노래와 춤을 즐기는 동생이 그의 카메라에 담겼다. ‘어른이 되면’이 아니라 지금 현재, 세상에 존재하는 한 인간이.
동생의 자립을 담은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의 감독이자 유튜버 ‘생각 많은 둘째 언니’ 장혜영씨를 만났다.
◇대학 4년 다닌 결론 ‘졸업장은 필요없다’
-연세대 4학년생이던 2011년 공개 자퇴했죠. 그 뒤에 후회 하지 않았나요.
“한 번도 후회 안 했어요. (웃음) 지금도 역시 잘했다고 생각해요. 저는 아니다 싶은 것을 지워가며 사는 사람이거든요. 그때 대학 졸업장은 받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죠.”
-시간과 돈을 들여 입학했는데 왜 4학년이 돼서야 그만 뒀어요?
“대학에서 대학의 가능성이 아니라 한계를 체감했거든요. 상아탑도 아니고 지식의 전당도 아니고 80년대처럼 정의의 공간도 아니었죠. 그저 취업 하려고 거쳐가는 공간, 다들 냉소적으로 생각하면서도 문제제기조차 하지 않는 이상한 대합실 같았어요. 물론 배우는 즐거움이 없지는 않았어요. 특히 저는 실업계 특성화고교인 (경기 하남시의) 한국애니메이션고(애니고)를 나왔거든요. 고등학교 때 학문의 기초를 배울 기회가 없었어요. 그래서 전공(신문방송학)과 상관 없이 듣고 싶은 강의를 찾아 들었죠. 4학년이었지만 졸업요건을 채우려면 1년을 더 다녀야 하더라고요.”
-그래도 공부를 잘했고 장학금도 받지 않았나요.
“1학년 때의 성적으로 외부 장학회에서 4년 장학금을 받을 기회를 얻었죠. 두 곳에 신청했는데 둘 다 될 정도로 학점은 좋았어요.”
그녀는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줬다. 4학년 때 자퇴를 하면서 그 장학회에 가서도 신고를 한 일이었다. 해마다 하는 신년회 자리에서다. 연단에 나가 마이크를 잡고 일종의 동정을 알리는 시간,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주신 학자금으로 4년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대학 졸업장이 필요 없다는 거예요. 이런 귀한 결론에 이르도록 장학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부분 황당한 표정이었고 일부는 깔깔 웃었다. ‘무슨 저런 별종이 다 있나’ 하는 표정으로.
“저한테는 떳떳한 게 중요하거든요. 어쨌든 4년간 장학금을 받아 대학을 다닌 걸 정말 고맙게 생각했어요. 그러니 자퇴한 사실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죠. 슬쩍 빠져 나오고 싶지 않았어요.”
-애니고는 왜 간 건가요?
“기숙사가 있는 학교였거든요.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어요. 중학교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가 맡겨졌죠. 동생은 그 전에 시설에 보냈고, 고등학생인 언니는 기숙사에 있었죠. 아버지 혼자 저를 키울 수 없으니 할아버지 댁에 저를 맡긴 거예요. 좋은 분들이었지만 많이 힘들었죠. 할아버지 할머니는 제게 양가감정이 있을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그 분들의 입장에서 저는, 아들 고생 시키고 도망간 나쁜 며느리의 자식이자, 불쌍한 아들의 자식이기도 했죠. 그 감정을 받아내는 게 힘들었어요. 언니가 기숙학교인 애니고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저도 그곳으로 탈출한 거죠.”
-애니고에서 대학을 간 건 쉬운 일이 아닐 텐데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수시를 넣었는데 떨어졌죠. 재수를 할 지, 다른 길을 갈 지 고민하다가 그래도 키워준 아버지가 고마우니 자랑을 시켜주고 싶다는 세속적인 욕망이 생겼어요. 그래서 석 달 간 눈 뜨고 자는 것 외에는 무조건 기출문제집 풀고 인강(인터넷강의)을 들으면서 입시를 준비했어요.”
-그렇게 공부해서 들어간 대학인데, 학교 밖에서 가치를 찾겠다고 자퇴한 거군요.
“대학 다닐 때 일본으로 교환학생을 간 게 중요한 경험이 됐어요. 그때 다른 종류의 삶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고, 자퇴하고 나서 많이 돌아다녔죠. 나에게 훨씬 더 잘 맞는 삶이 있을지 모르니, 한국에 갇혀 있지 말자는 생각으로요. 2년쯤 그렇게 다니다가, 2013년 모든 게 변했죠.”
-왜요?
“비자 때문에 몇 개월에 한 번씩은 귀국해야 했는데, 그 때 동생이 있던 시설에서 인권침해 사건이 일어났거든요. 동생도 주요한 피해자 중 하나였고요.”
-어떤 피해였나요?
“부모님은 그곳이 종교시설이기 때문에 동생을 더 잘 돌볼 것이란 판단으로 보낸 거였어요. 그런데 재활교사 중 하나가 내부 고발, 일종의 양심선언을 했어요. 15명의 장애인을 교사 2명이 관리하는 곳이었으니 프라이버시 존중이나 청결 관리가 어려운 환경이기는 했지요. 그런데 교사들이 카톡방에서 자기가 돌보는 장애인들을 거론하면서 실질적인 위협 수준의 욕설을 주고 받았던 거예요. ‘그○이 오늘 네 머리 잡아 당겼지. 오늘 내가 복수해줄게. 미친○!’ 하는 식이죠. 또 장애인들의 행동을 말린다는 이유로 힘을 써서 밀어붙인다거나, 안정실이라는 이름의 격리실에 가두거나, 밥 먹이는 게 힘드니 반찬을 잘게 잘라서 밥과 함께 국에 말아서 주고 마시게 한다거나… 일상적인 인권침해였죠.”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크게 공론화되지 못했다. 학부모들이 공론화를 되레 막았기 때문이다.
“학부모 회의에 가서 정말 충격을 받았죠. 저는 모든 걸 불사하고 싸우겠다는 각오로 갔는데 말이에요. 그렇다고 당장 동생을 데리고 나올 형편도 되지 못했어요.”
-기분이 처참했겠네요.
“죄를 지은 기분이었죠. 내가 책임지지 못할 일을 벌여서 그 뒷감당을 혜정이 진다는 생각... 문제 제기한 나 때문에 내가 보지 못하는 데서 혜정을 복수의 대상으로 삼는 건 아닐까 괴로웠죠.”
-그 때 동생을 데리고 나와야겠다고 생각했나요?
“인권단체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의 말이 결정적이었어요. 동생이 있던 시설 문제로 만났을 때인데, 갑자기 제게 동생은 자립 준비 하지 않느냐고 묻더라고요. 저는 당연하다는 듯이 안 한다고 답했죠. 내 동생은 장애가 심해서 못한다고요. 그랬더니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자립할 수 없는 장애인은 없다’고 하는 거예요. 저는 속으로 ‘뭣도 모르면서 마구 말하네. 내 동생이랑 살아봤나. 내 동생을 세상에서 제일 잘 알고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나인데. 이론만 갖고 얘기하네’ 했죠. 그게 느껴졌는지 그가 다시 말했죠. ‘생각을 시설에서 시작하면 시설로 돌아갈 수밖에 없지만, 생각의 시작을 동생의 삶에 두면 달라진다’고요. 수치심이 확 밀려왔어요. 나는 그간 이중잣대를 갖고 살아왔던 거죠. 나와 동생은 다른 인간이라고, 동생은 장애가 있고 나는 장애가 없으니까, 동생이 시설에 사는 게 당연하다고. 그 때부터 동생을 시설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데 인생을 걸기로 결심했죠.”
그녀의 다큐멘터리가 이런 고백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 게 그 때문이었다. ‘만약 누군가 열세 살의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나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너는 이제 가족들과 떨어져서 외딴 산꼭대기의 건물에서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과 평생을 살아야 해. 그게 네 가족들의 생각이고 너에게 거절할 권리는 없어. 이게 다 네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야.’
◇열 세살의 동생처럼 시설에 보내졌다면…
-탈시설에 준비가 필요했을 텐데, 어떻게 했나요.
“일단 돈을 벌어놔야 했죠. 그리고 공부해야 했어요. 혜정이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우리 사회에 장애인 지원 제도는 뭐가 있는지, 또 혜정을 돌보는 데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누군지. 우선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영상을 만들 줄 아는 재주가 도움이 됐죠. 소셜미디어 시대와 맞물려서 수요가 많아졌거든요. 하면 할수록 일이 계속 들어오는 상황이었죠. 또 장애에 관한 책을 찾아보고 인터넷을 검색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죠.”
-동생 혜정씨도 준비를 해야 했겠죠?
“네, 그리고 하나 더 아버지를 설득하는 일도요. 아버지에게 슬쩍 말을 꺼냈는데, 처음엔 강하게 반대를 하셨죠. ‘혜정이는 내가 책임져야 할 내 딸이다. 형제인 네가 대신 감당하는 건 옳지 않다. 그리고 혜정이는 이미 17년을 시설에서 살아 거기가 집이라고 생각할 거다. 네 마음대로 데리고 나오겠다는 것 역시 폭력적인 생각일 수 있다.’ 혜정의 의사는 저 역시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며칠씩 혜정을 데리고 나와 지내기도 하고 여행도 다니면서 1년 동안 꼬셨죠. (웃음)”
-어떻게요?
“혜정이 좋아할 만한 일들을 했죠. 시설 밖에 좋아하는 게 많이 있어야 나오고 싶은 생각이 들 테니까. 오래 떨어져 살았으니 언니를 낯설어 하지 않고 편안하게 느끼게 하는 것도 중요했고요.”
-시설에서 나오고 싶어 한다는 걸 확실하게 느낀 일이 있었나요?
“표정을 보면 알아요.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확신이 생겼죠. 한번 자유를 맛본 사람이 그 이전으로 갈 수 없듯. 초반에는 며칠 나와 있으면 언제 돌아가냐고 묻던 혜정이 몇 개월 지나고는 기간이 길어져도 그런 얘기를 하는 횟수가 줄었죠. 또 공유하는 경험이 많아지니, 우리만의 대화를 할 수 있게 됐어요. 그렇게 1년을 공 들인 구애작전의 클라이맥스가 드디어 왔죠.”
-뭔가요?
“디즈니랜드요! 혜정이 ‘토이스토리’와 ‘인어공주’를 굉장히 좋아했거든요. 일본 도쿄의 디즈니랜드에 ‘인어공주’의 세트와 에릭 왕자 코스프레가 있어요. 토이스토리 퍼레이드도 하고요. ‘왜 이제 왔을까’ 싶을 정도로 좋아하더라고요. 다녀온 뒤에 처음으로 혜정이 저한테 먼저 전화를 했어요. 많게는 하루에 14, 15통씩. 가슴이 정말 두근두근 했죠. 그 무렵 혜정한테 ‘언니랑 살래?’라고 물으니 너무 쉽게 ‘그래!’라고 대답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뒤에 ‘그럼 다른 시설로 가는 거야?’라고 묻는 거예요. 보여줘야 알 테니까 함께 살 집을 보러 다녔죠. 그리고 혜정이 ‘여기서 살래’ 하는 집을 택했고, 이사를 했죠. 그게 다큐멘터리의 시작이에요.”
-17년 만에 다시 함께 사는 거죠. 어린 시절 동생은 어떤 존재였나요?
“저의 전부였죠. 저의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 공장에 다니던 아버지는 돈을 버느라 늘 바빴고, 전생의 업보로 딸이 그렇게 됐다고 믿던 어머니는 기적으로 동생을 치료 하겠다면서 종교(불교) 활동에 열심이었어요. 큰 언니와 달리 저는 막내를 돌보는 착한 둘째 언니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죠. 게다가 저는 엄마를 너무 사랑하는 꼬맹이였기 때문에 엄마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장혜영이 아니라 ‘혜정이 언니’로 산 거죠.”
-혜정의 언니로서 삶이란 뭐였나요?
“예를 들면, 장래 희망을 쓰면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정신과 의사’. 왜냐면 동생을 낫게 해주고 싶어서. 학교 끝나고 친구들이 놀자고 해도 당연히 ‘안돼’ 했고요. 동생을 돌봐야 하니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늘 동생이었죠.”
-늘 함께했던 동생을 시설에 보냈을 때도 충격이었겠네요.
“우리 집보다 더 전문적으로 잘 돌봐줄 수 있는 곳으로 가게 됐다는 부모님의 통보였죠. 엄청 울었어요. 악몽도 많이 꿨죠. 시설에서 동생이 (말을 하지 않고) 웅얼거린다고 괴롭히는 꿈이요.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있어서 다 알아 듣는데, 그러니 내가 동생을 더 잘 돌볼 수 있는데…”
-이 질문을 해도 될지 모르겠어요. 어머니는 왜 집을 나간 건가요.
“제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어요. 학교에 있는데 엄마가 삐삐에 음성 메시지를 남겼죠. ‘엄마 이제 집에 안 돌아가.’ 그걸 듣는데… 이해가 되더라고요. 어린 제 눈에도 많이 힘든 게 보였으니까. 이러다 엄마가 무너지면 어쩌나 싶었거든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혜정을 시설에 보낼 때 엄마는 이미 집을 나가려고 준비를 한 거였죠.”
-엄마한테 당장 달려갔을 것 같은데요.
“근데… 그때 ‘엄마도 이제 자유를 찾을 때가 됐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가서 붙잡지 않았어요?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나도 데리고 가면 안 되냐고 했죠. 안 된대요. 그 말에 더 이상 어쩌지를 못했어요. 그때 저는 제가 어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우는 그녀를 보면서 눈물을 꾹 참았다.
◇장애인의 탈시설, 가정 아닌 사회로 돌아오는 것
-동생과 다시 함께 살아보니 어땠나요.
“흠…! 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독이 되는 게 없다고 느꼈어요. (웃음) 이사한 집에서 처음 자고 일어났는데, 막막하더라고요. 아침밥 먼저 해야 하나, 아니면 씻는 것부터 해야 하나. 우리는 그런 일상생활을 하나하나 ‘발명’해 나가야 했죠.”
-다큐멘터리를 보면 친구들이 시간을 나눠서 동생을 돌보는 장면이 나오던데요.
“장애인의 탈시설은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의미가 아니라 한 시민으로서 사회에 돌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중요해요. 가족이 장애인의 돌봄을 온전히 부과 당하는 게 아니라 사회 구성원이 부담을 나눠야죠. 저 역시 그런 관점에서 생활을 짜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공적인 서비스는 당장 받을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신뢰할 수 있는 주변의 동료, 친구들에게 저의 계획을 알리고 도울 수 있는 사람을 모았죠. 마치 제가 ‘장혜정의 자립생활 주택 매니저’가 된 것처럼요.”
-다큐멘터리에 평범한 일상이 나오는데 독특하게 느껴졌어요.
“대개 장애인이 등장하는 서사는 ‘함께 살기 너무 어려운 사람’이라는 프레임을 강조하죠. 읍소하지 않으면 받아들여지지 않는 존재, ‘그런 안타까운 존재이니 제발 답을 주세요’ 하는 식이죠. 그런데 장애인과 함께 생활하는 건 무슨 대단한 이타심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 단지 생활양식을 조금만 바꾸면 가능하다는 걸 알리고 싶었어요. 사실 이건 노후 보장 보험이기도 해요.”
-무슨 뜻이죠?
“제가 주위에 혜정을 함께 돌볼 수 있는지 의사를 물으면서 이기심으로 하라고 했거든요. 무슨 말이냐면, 혜정처럼 생산에 기여하지 않는 사람도 인간적인 존엄을 보장 받으며 살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너 역시 언젠가 노인이 됐을 때 잘 살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니 미래에 언젠가 연약해질 너도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종의 보험이라고요. (웃음)”
다큐멘터리에서 그녀의 친구들은 혜정씨와 산책을 하기도 하고 혜정씨에게 노래를 가르치기도 한다. 마치 ‘돌봄 공동체’처럼. 사회가 이 같은 돌봄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장애인’ 설명없이 유튜브에 여행 영상 올렸더니
-유튜브에 동생과 보낸 일상을 영상으로 찍어 올리기도 했죠?
“유튜브 콘텐츠에서 중요한 건 아이덴티티와 퍼스낼리티예요. 장애인권 얘기를 다루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 싶어 미루다가, 동생과 일본 여행 다녀온 게 계기가 됐어요. 처음엔 별 생각 없이 여행을 쭉 영상으로 찍었는데 다녀와서 보니 ‘이거다’ 싶더라고요. 그 영상에는 내 동생이 장애가 있다거나 하는 설명이 전혀 없어요. 그저 자매가 여행한 영상이었죠. 이걸 유튜브에 올리면 어떨까 했어요. 장애인이 등장하는 영상에는 늘 장애인이란 꼬리표를 붙이잖아요. 비장애인의 영상을 디폴트(기본)라고 생각하니까.”
-유튜브 반응이 어땠나요?
“장애인이 여행하는 영상을 처음 봤다는 반응, 이런 걸 낯설게 느끼는 나 자신을 반성한다는 댓글, 장애인인지 몰랐다는 의견도 있었고요. 그때 알았어요. 일상의 순간에 장애인이 들어가는 순간 (장애인의) 부재를 환기시킨다는 걸. 무엇보다 그때 동생이 카메라에 찍히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렇다면 다큐멘터리도 찍어보자고 결심했죠.”
다큐멘터리 제작비는 크라우드 펀딩으로 모았다. 1,249명이 종잣돈을 보탰다.
-제목을 왜 ‘어른이 되면’이라고 지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엄마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늘 혜정한테는 ‘어른이 되면’이라는 단서를 붙였어요. 혜정한테 뭘 하면 안 된다고 할 때마다요. 나중에는 혜정이 혼자서 ‘어른이 되면 할 수 있어’라고 중얼거리곤 하더라고요, 얼마나 많이 들었으면. 발달장애인한테는 그런 영원한 미성숙의 저주가 있는 거죠. 이미 서른이 되어 어른이 되고도 남을 만큼 시간이 흘렀는데. 그간 혜정한테 무수히 ‘어른이 되면’이라고 말했던 사람들이 이걸 보고 뜨끔하면 좋겠어요. 장애인 영화라고 하면 보통 성장기라고 생각하는데, 이건 전혀 그런 얘기가 아니거든요. 그걸 역설적으로 제목에 담은 거죠. 장애인을 누가 어른으로 만들지 않고 있는지 생각해보기를 바라요.”
-언제까지 동생과 살 수 있을까요.
“모르죠, 뭐. (웃음) 평생 같이 살 수도 있고 혜정이 ‘도저히 언니와 함께 못 살겠어’ 라고 생각하면 독립할 것이고. 그런데 저는 동생을 워낙 좋아하니까 제가 먼저 나가라고는 못할 거 같아요. 제 목표는 제가 빨리 죽어도 동생이 아무런 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거예요. 24시간 활동지원서비스 제도만 자리를 잡아도 가능하죠.”
◇답을 얻기 전까진 질문은 계속 남겨둔다
-관객의 반응은 어떤가요.
“장애인 영화인데 밝다는 반응이 있어서 좋았고요. 또 어떻게 제도가 개선돼야 할 지 의견을 묻는 분들도 많고요. 내년이 3ㆍ1운동 100주년 되는 해잖아요. 100년 전 조선은 독립을 마치 꿈처럼 생각했겠죠. 그렇지만 독립을 꿈꾸는 독립투사들이 있었으니 마침내 우리가 독립을 누리게 됐어요. 그런 걸 생각하면 장애가 있다는 이유 만으로 가족과 떨어져서 자기가 전혀 선택하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하는 일이 없어지는 사회도 가능하지 않겠어요? 시간은 걸리지만 바뀔 거라고 생각해요.”
-유튜브 방송이나 다큐멘터리도 그래서 만든 거겠지요?
“명확해요. 공적인 서사지요.”
-개인 장혜영의 삶은요?
“저도 한 때는 ‘혜정의 언니’와 ‘장혜영’이 분리될 거라 생각했어요. 그러니 (혜정의 언니로 사는 동안) 개인 장혜영은 어딘가에 넣어두자고. 그런데 동생과 함께 사는 저는 그 어느 때보다 저답더라고요. 그 전이 오히려 저의 신념과 행동이 일치 하지 않아 괴로운 삶이었죠.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말하면서도, 나 개인은 장애인의 삶과 비장애인 삶은 별개라고 생각했던 거죠. 대학 자퇴 후 2년 간 떠돌 때 그래서 저 스스로를 위선자라고 여겼어요. 그렇게 동생이 소중한 존재라고 믿으면서 몸은 프랑스에서 친구들과 술 마시며 놀고 있으니까.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해도 마음 속에선 마구 바람이 불었죠. 지금의 삶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그래서 지금 힘은 들지라도 잘 지내고 있어요. 힘들지 않은 삶이 없잖아요?”
-스스로 ‘생각 많은 둘째 언니’라고 하죠? 유튜브 활동할 때 이름도 그렇고요.
“혜정의 둘째 언니라는 게 저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더라고요. 그리고 혜정의 둘째 언니로 살아간다는 건 정말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생각 많은 둘째 언니, 장혜영의 삶을 지켜온 삶의 도는 무엇인가요?
“호기심을 잃지 않는 것. 내가 납득할 답을 얻기 전에는 계속 질문인 상태로 남겨두는 거죠. 각자 삶을 살아내는 방법이 있을 테니까. 그 각자 삶의 답이 다르다고 생각하면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고 합의점을 찾아나가면 되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조급하지가 않아요.”
-동생의 문제도 연장선이겠죠?
“그렇죠. 보통 사람들은 학습의 결과로 ‘장애인을 차별하면 안돼’라고 생각은 하지만, ‘왜?’라고 되물었을 때 의외로 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심지어 불쌍하니까 차별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죠. 그건, 내가 누리는 권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누리는 천부인권이 아니라 운이 좋아 누린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맞다. 우리는 아마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거다. ‘장애인으로 태어나지 않아 정말 행운이다.’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사회가 희망이 있을까. 이제야 알았다. 그녀의 다큐멘터리가 질문의 연속인 이유를. 그 무수한 질문 중 하나라도 답을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를 바라는 의도였다. 왜 지금까지 살면서 스티커 사진을 찍는 장애인을 한번도 보지 못했는가. 시상식에서 흥에 겨워 무대로 나가 가수와 함께 춤을 추는 장애인을 보지 못했는가. 왜 장애인은 시설에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가. 장애인 차별이 부당하다고만 생각했지, 왜 차별하지 않을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했는가. 동생과 함께 사는 일상을 담은 지극히 평범한 이 다큐멘터리가 낯선 이유다.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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